‘블랙리스트’ 공소장 살펴보니
김기춘, 취임 직후 작성 지시
“종복세력이 문화계 장악” 발언도
유진룡에게 “지원 배제하라” 명령
국정원은 ‘좌파 작가 폐단’ 보고서
제주 해군기지 반대 활동은 물론
野 지지자 동생까지 지원 차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은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를 송두리째 부정해 버린, 대한민국 헌정사의 ‘흑역사’로 기록될 게 분명하다. 박근혜 대통령과 김기춘(78ㆍ구속)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에게 자신들과 다른 정치 성향의 인물들은 더 이상 국민이 아니라 ‘척결 대상’일 뿐이었다. 시대착오를 넘어 천박하기 짝이 없는 인식이지만, “아니됩니다”라고 말하는 청와대 참모는 없었다.
지난달 31일 직권남용 등 혐의로 구속기소된 김종덕(60)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의 공소장에는 이 같은 사실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김 전 실장은 2013년 8월 초, 취임하자마자 블랙리스트 작성부터 주문했다. 같은 해 8월 21일 그는 자신이 주재하고 대통령 수석비서관들이 참여하는 회의(이하 실수비)에서 “종북세력이 문화계를 15년간 장악했다. 정권 초기에 사정을 서둘러야 한다. 이것은 비정상의 정상화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국정과제”라고 강조했다. 다음달 9일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가 상영되는 것은 종북세력이 의도하는 것으로, 이 영화의 제작자와 펀드 제공자는 용서가 안 된다”고 하는 등 비슷한 취지의 발언은 계속됐다.
그 해 12월 김 전 실장은 유진룡 당시 문체부 장관에게 ‘보수 가치’의 확산을 언급하면서 “정부에 비판적 활동을 한 문화예술인들 지원을 배제하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을 풍자하거나 정부비판 여론에 찬동하는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정부 지원은 부적절하다’는 기조도 청와대 내부에 확산됐다. 블랙리스트 정책이 구체화한 것이다.
‘좌파 척결’ 시도는 문화예술계를 넘어 전 분야로 확산됐다. 김 전 실장은 이듬해 1월 3일, 실수비에서 “문체부와 교육부, 복지부, 안전행정부 산하 시만단체에 대한 정부 지원 실태를 전수조사하라”고 했다. 석 달 뒤에는 박준우 당시 정무수석을 불러 “수석실별로 나눠져 있는 업무 관련 비서관들을 모아 태스크포스(TF)를 꾸리라”고도 했다. 이에 청와대 내 모든 수석실 비서관들이 참여한 ‘민간단체보조금 TF’가 2014년 4월 초부터 5월 하순까지 운영됐고, 야당 후보자 지지 선언이나 정권 반대운동 등에 참여했던 인사들에 대한 ‘솎아내기’가 이뤄졌다. 이들에게 지원된 정부예산은 ‘문제 예산’으로 명명됐다. 국가정보원도 ‘좌파 성향 작가들에게 문예기금이 지원되는 폐단을 시정해야 한다’는 보고서로 분위기를 띄웠다. 박 대통령도 이런 진행상황을 수 차례 보고받았다.
그 결과는 현 정권 입맛에 맞지 않는 이들에 대한 노골적 차별이었다. 정부 지원대상을 정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책임심사위원 1순위 후보자였던 황현산 작가 등 19명은 제주해군기지 반대 등의 이유로 선정되지 못했다. 문예기금 지원 심의에서도 325명의 개인 또는 단체가 부당하게 탈락했다. 영화계에선 ▦‘천안함 프로젝트’ 상영 ▦야권 지지자 박찬욱 감독의 동생 등의 이유로 8명이 지원 배제를 당했고, 출판계에서도 5ㆍ18민주화항쟁을 다룬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 등 22종의 도서가 ‘문제도서’로 찍혔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공소장에 헌법 11조와 22조 등을 인용해 “모든 국민은 문화 표현과 활동에서 차별을 받지 아니하고, 자유롭게 문화를 창조하며 문화를 향유할 권리와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고 적었다. 이러한 권리와 자유를 보호해야 할 헌법상 의무를 대통령과 공무원들이 저버렸다는 게 특검 결론인 셈이다.
김정우 기자 woo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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