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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문화는 무엇으로 사는가

입력
2017.01.3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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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은 2011년 동일본대지진을 모티프로 삼았을 뿐 아니라 세월호 참사에 대한 위로도 담겨있다. 미디어캐슬 제공
일본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은 2011년 동일본대지진을 모티프로 삼았을 뿐 아니라 세월호 참사에 대한 위로도 담겨있다. 미디어캐슬 제공

몇 년 전 한 무명배우와 술자리를 함께 했다. 상업영화에선 단역에 그쳐도 독립영화계에선 주연급으로 활동하는 배우였다.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해 상까지 받은 영화에 출연한(그가 연기한 장면은 다 편집되고 그는 사진으로만 등장한다)이력을 은근히 자랑스러워했다.

저예산 독립영화를 활동 근거로 삼으니 그의 생계는 간단치 않았다. 그는 주차장에서 주차관리 일을 하며 다음 작품을 기다린다고 했다. 언제 출연 제의를 받을지 몰라 당장 그만둬도 고용주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 일거리만 찾는다고 덧붙였다. 이후 그가 출연하는 영화를 1년에 한 두 편 꼴로 마주하고 있는데 반갑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힘겨운 삶을 잘 버텨내며 자기 길을 꿋꿋이 걷는 듯해서다. 그가 등장하는 영화 대부분은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 지원으로 만들어졌거나 영진위의 지원을 받는 독립영화전용관에서 만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문화에 대한 공공지원이 무명배우의 활동에 작은 응원이 된 셈이다.

문화를 만드는 이의 삶은 종종 고통스럽다. 시장의 논리는 비정하여 상업영화든 독립영화든 허름한 연극 무대든 문화계 어느 곳에나 예외 없이 적용된다. 아니 저예산이나 예술 등의 수식이 붙는 문화 활동일수록 시장은 더 가혹하게 작동한다. 제작비 1억원을 들인 영화가 100억원짜리 블록버스터보다 자본을 회수하기 어렵고, 무명배우들로 진용을 꾸린 연극이 아이돌을 앞세운 뮤지컬보다 물질적 이익을 얻을 가능성이 작다. 문화계에 대한 공공 지원이 낮은 곳으로 향해야 하는 이유다.

“이제야 아귀가 맞는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의 실체가 드러난 뒤 문화계 여러 인사들이 공통적으로 내놓는 반응이다. 지원사업에 신청을 했다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밀려난 관계자일수록 복잡다단한 심경을 비춘다. 자신들의 작품이 열등해서가 아니라 정부에 ‘찍혀서’ 지원 대상이 되지 않았다는 점에 안도하면서도 황당해 하고, 앞으로의 삶에 막막해 한다.

문화계라는 테두리 안에서 삶을 일궈가는 사람들은 전복적 기질이 다분하다. 예술은 기존 체제에 대한 저항과 반발을 에너지 삼아 전진한다.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조직적으로 네 편 내 편을 확연히 가르고 정부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지원을 하겠다는 발상부터가 반달리즘과 다름없다.

2011년 가을 프랑스 출신의 유명 영화감독 뤽 베송이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다. 베송은 영화학도들을 대상으로 한 영화 연출 강의를 한 뒤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한 일본 청년이 기가 죽은 목소리로 시작해 울먹임으로 끝나는 질문을 했다. “(그 해 봄 발생한)동일본 대지진의 충격이 워낙 커 미래가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살아가야 하냐”는 하소연이었다. 베송은 “그 힘든 감정을 영화에 담으라”고 격려했다. 상처가 예술로 승화될 수 있다는, 상투적인 답변이었으나 일본 청년은 큰 위안을 얻은 표정이었다.

지난해 12월 개봉해 일본영화 역대 한국 흥행 기록을 매일 갈아치우고 있는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영진위 집계 30일 기준 342만5,904명)을 보며 저 장면을 떠올렸다. 질문을 던진 일본 청년은 아니어도 일본 영화인들은 대재난으로 마음을 크게 다친 일본 국민에게 이 영화로 따스한 위안을 건넨다. 죽은 자들이 살아 돌아온다는 판타지가 한국 관객의 목젖까지 뜨겁게 한다. 세월호 참사가 연상돼서일 것이다. ‘너의 이름은’의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너의 이름은’의 시나리오를 쓰던 때 세월호 참사에 대한 소식을 연일 접했다”며 “그 때 느낀 것들이 이 작품에 어느 정도 녹아 들어 있다”고 밝혔다. 지원금을 무기 삼아 문화인들을 일렬종대로 세우려 하고 세월호 참사 유가족을 지지한 문화인들에게 불이익을 주려 한 정부의 국민으로서 부끄러울 뿐이다. 한국에서 문화는 무엇으로 사는가, 과연 문화로 살 수는 있는 것인가, 문화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근원적인 질문을 자꾸 던지게 되는 요즘이다.

라제기 문화부장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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