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하루를 처가에서 보냈다. 장모님의 푸짐한 상차림 덕분에 모처럼 뱃속이 큰 호강을 누린 날이었다. 동그랗게 부푼 뱃살 탓에 앉아있기 버거워 저녁 늦게 짧은 산책을 나섰다. 낮부터 계속 쏟아진 눈발 속을 잠시나마 걸을 요량이었다. 천천히 아파트 14층 계단을 걸어 내려와 온통 눈 천지인 도로에 발을 디디니 기분도 덩달아 상큼해졌다. 거친 눈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을 걷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는 곳 앞에서였다. 걸음을 멈춘 것은 뭔가 머리를 스쳐간 생각 때문이었다. 온통 하얀 눈을 뒤집어 쓴 경비원 할아버지가 꾸부정한 모습으로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 있었다. 명절 동안 나온 종이박스 등의 폐지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궂은 날씨 때문인지 주민 한두 사람이 양손에 버릴 것들을 들고 나와 툭 던져놓고는 종종걸음으로 돌아가는 모습도 보였다. 처음 폐지들을 보며 머릿속을 스쳤던 생각이 뭐였더라. 나는 어정쩡하게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에이. 이렇게 마구 갖다 던지면 어떻게 치우라는 건지. 쯔쯧!” 초로의 경비원이 꺼낸 혼잣말을 무심코 들은 나는 세월을 품은 그의 어깨와 등을 보다가 그제야 조금 전에 들었던 생각의 실체를 떠올릴 수 있었다. 우리가족이 살고 있는 동네의 이웃주민인 어느 할머니의 얼굴이 그 실체의 주인공이었다.
서울 성산동에서 가장 높은 해발 55미터를 ‘자랑’하는 성미산. 산꼭대기 바로 아래 보금자리를 틀고 있는 나는 폐지를 모으며 사는 한 할머니와 꽤 자주 스치듯 만난다. 서로 얼굴만 알 뿐 통성명을 하거나 손 인사를 건넨 적은 없는, 아직 이웃이라 하기엔 한참 모자란 사이이다. 그럼에도 늘 얼굴을 부딪치기에 대면 대면할 뿐 서로 모르는 사이는 아니다. 우연한 스침 외에도 이상하게 그 할머니를 살피고 있을 정도로 여운이 짙다. 70세는 넘어 보이지만 키가 훤칠하게 크신데다 허리도 꼿꼿하셨다. 늘 푸석푸석한 파마머리에 화장기 없는 맨얼굴인 채로 할머니는 작은 손수레에 폐지들을 모아서 높은 경사도를 지닌 골목길을 힘차게 오가셨다. 어찌 보면 생계를 위한 일이라기보다는 몸을 놀리기 싫은 당신 삶의 부지런한 일상 중 하나일 지도 모르겠다. 손주들 용돈을 직접 주고 싶은 의지일 수도 있고. 항상 인상을 쓰고 계신 탓에 주름이 많아 보였는데, 언뜻 백설 공주 동화에 나오는 마녀처럼 보이기도 했다. 언젠가 한번 또래 할머니들과 웃음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본 뒤로는 그 해맑은 미소에 흐뭇해졌던 적도 있었다. 기회가 닿으면 언제고 수레 한번 밀어드린다 작심만 하고 지낼 뿐 아직 안면을 트지는 못하고 있다.
처가 아파트 단지의 폐지더미를 보면서 아마도 그 할머니에게 한 가득 가져다 드리면 좋아하실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한 듯하다. 값싼 동정심이라기보다는 할머니와 친해질 기회를 ‘노리는’ 어설픈 이웃의 정이 아닐까 스스로 허접스런 위안을 삼아본다. 예전부터 할머니를 뵈면 얼마 전 돌아가신 내 어머니의 건강을 염려하며 은근한 소망을 품었다. 남의 시선 의식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또 당찬 걸음으로 오르막길을 오가는 그 건강함에서 우리 어머니의 몸도 그러하길 바라곤 했다. 설 연휴가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니 조만간 할머니와 스치는 순간이 또 오겠지. 이번엔 맘먹고 환한 웃음을 담아 인사를 먼저 건네야겠다. 세상살이가 만만치 않은 요즘 주변의 삶을 살피거나 관계의 의미를 새기는 일이 손쉬운 일이 아닐 수는 있다. 그러나 먼저 인사 한번 건네는 것이 무에 그리 대단히 어려운 일이겠는가. 금세 할머니의 화답이 올 수 있지도 않을까.
“내가 계속 지켜봤는데 딸아이가 아주 예쁘게 생겼수~ 이름이나 좀 알려주시우~”하고 말이다.
임종진 달팽이사진골방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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