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필코 이름을 바로잡겠다.” 공자가 답하자 자로가 대꾸했다. “그러시군요.” 스승의 면전인지라 겉으론 예를 갖췄지만, 속뜻은 영락없는 “고작 그건가요?” 정도였다. “선생님께선 세상 물정에 어두우십니다. 왜 하필 그것을 바로잡으신다는 겁니까?”라며 격한 실망을 감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명(正名)”이라는, 유학의 장구한 역사와 함께했던 핵심 화두는 이렇게 처음으로 세상에 던져졌다. 자로는 위나라 군주가 스승 공자를 재상으로 모시고자 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공자를 찾아갔다. 그러곤 다그치듯 재상이 되시면 무엇을 가장 먼저 하시겠냐고 여쭸다. 이에 공자가 내놓은 답이 “정명”, 곧 이름을 바로잡겠다는 것이었다.
요새로 치자면, 차기 대통령이 된다면 무얼 가장 먼저 하겠냐는 물음에 인문 진흥을 확실하게 챙기겠다고 답한 셈이었다. 지금 적다고 할 수 없는 대권주자 가운데 인문 진흥을 손꼽아 언급한 이가 없음을 보건대, 그런 답변에 동조할 유권자는 몹시 적을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안정되고 풍요로운 삶이 인문적 삶보다는 한층 절실한 과제이기에 그렇다. 자로의 반응이 과하게 보이기는커녕, 은근 동감마저 되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공자는 왜 이름을 바로잡겠다고 했을까? 그는 투덜대는 자로를 단호하게 혼낸 후 “이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순통하지 못하게 된다”고 일깨웠다. 그가 말한 정명의 실상이 언어를 순통케 하는 것이었음이다. 여기서 ‘순통하다(順)’는 것은, 말이 가리키는 바와 그 실제가 일치한다는 뜻이다. 공자가 예로 든 “군군신신(君君臣臣)” 같이, 곧 임금이란 이름으로 불리면 그 실제가 참되게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란 이름으로 불리면 실제도 온전히 신하다워야 한다는 얘기다. 만사만물이 그렇듯 자기 이름과 그 실제가 부합되도록 하는 것이 정명의 실상이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정명은 정치인보다는 인문학자의 일인 듯싶다. 그러나 공자 보기에 이는 정치의 기본 가운데 기본이었다. 위의 말에 이어 그는 “말이 순통하지 못하면 일이 성취되질 못한다. 그러면 예악이 흥하지 못하게 되고 그 결과 형벌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한다. 그리 되면 백성은 손발 둘 데가 없어진다.”(‘논어’)고 부연했다. 여기서 예악은 예악제도, 그러니까 문물제도를 가리킨다. 이것의 흥성과 형벌제도의 공평무사한 운용은 정치의 요체다. 이름이 바로서지 못하면 결국 정치가 온전치 못하게 되어 백성이 손발 둘 데를 모르게 되는, 곧 안심하고 의지하며 생활할 수 있는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래서는 미래를 대비할 수 없게 된다. 미래가 그려지지 않으면 현재를 가치 지향적으로 살기 어려워진다. 더구나 공자가 살았던 때는 기존 사회질서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던 시기였다. 역사를 보면 혼란의 시기에는 특히 사회적 약자인 백성의 고통이 크게 가중되곤 했다. 이른바 ‘사회적 갑’들이 이름의 질서를 해침으로써 국가사회의 골간인 문물제도를 무력화하고, 이를 기화로 기득권 강화에 몰두한 결과였다. 저 옛날에나 있었던 일이 아니다. 바로 우리 주변에서 버젓이 자행되는 일이기도 하다.
지난 이명박 정부 때부터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은 너무도 당당하게 언어의 권위와 질서를 허물어왔다. 언어가 직, 간접적으로 환기하는 제반 가치를 조롱하고 구박함으로써 언어와 실제가 서로를 배반케 했다. 법치가 대표적 예다. 법치는 실질적으론 ‘사회적 을’이나 준수해야 하는 규범이 됐다. 돈 없으면 법이라도 지키라는 생짜였다. 정의도 ‘루저(loser)’들이나 하는 자기 합리화로 전락됐다. 양식과 상식을 담은 언어는 물론 시민의 정당한 비판과 저항에 동원된 말들은 ‘종북’이나 ‘좌빨’의 언사로 몰렸다. 헌법을 구성한 말들조차 공개적으로 집요하게 무시되고 유린됐다. ‘건국절’ 같은 사이비 말을 내세워 이름의 질서에 지독한 바이러스를 감염시켰다.
국가 공동체는 그렇게 중병에 걸려갔다. 암세포는 더불어 살 줄 모른다. 그것이 유능할수록 신체가 빨리 죽는 이유다. 하여 사회적 약자들에게 더 한층 치명적이다. 모세혈관이 파괴되고 말초신경이 훼손됐다고 심장이 멈추거나 뇌가 죽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들 없는 심장이나 뇌는 모조품에 불과하다. 지닌 힘의 크기와 무관하게 사회구성원 모두가 더불어 살 수 있어야 하는 까닭이다. 사회적 약자라도 미래가 보장돼야, 달리 말해 인민이 안정적으로 미래를 도모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갖춰져야 국가도 지속 가능하게 굴러가기에 그렇다.
그래서 정명은 다른 누구보다도 더 정치인의 본업이 돼야 한다. 정명이 미래 보장으로 귀결되는 회로의 구축은 개혁의 궁극적 목표여야 한다. ‘인문사회’가 국가의 기본이 돼야 하기에, 다시 말해 제도와 정책, 이념 차원서 인간다움을 삶과 사회의 제일 가치로 지향하는 국가로 거듭나야 하기에 그렇다. 또한 지금 추진하는 개혁이 사회적 약자에게도 자산이 돼야 하기에 더욱 더 그러하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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