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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공무원만 살기 좋은 나라’의 실상

입력
2017.01.30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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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의 야경. 이 아름다운 풍경의 원동력은 야근하는 직장인이다. 게티이미지 뱅크
도심의 야경. 이 아름다운 풍경의 원동력은 야근하는 직장인이다. 게티이미지 뱅크

한 마리 용이 구비구비 용틀임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정부세종청사. 용의 몸통을 따라 각 부처별 청사가 구름다리로 이어져 있다. 1동(국무총리실)서 15동(문화체육관광부)까지 걸으면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여러 부처 내부 모습을 한번에 둘러볼 수 있다.

밤에 청사 복도를 따라 퇴근해 보면, 정말 많은 중앙부처 공무원들이 그 때까지도 집에 가지 못하고 여전히 일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기획재정부 청사에선 밤 10시가 가까워오는 시간에도 세제실 직원들이 사무실 테이블에 둘러 앉아 다음날 보고할 자료를 챙기는 모습이 보인다. 해양수산부 대변인실에선 당직 직원이 텔레비전 앞에 앉아 지상파 뉴스에 나오는 자기부처 소식을 챙긴다. 농림축산식품부에선 조류인플루엔자(AI) 대책 상황실이 밤새 불을 밝힌다.

환경부와 법제처를 잇는 구름다리를 건너, 청사 밖으로 나와서 보는 정부세종청사의 밤은 그야말로 불야성이다. 그 빛의 동력은 사람이다. 일에 묶여 가족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수많은 엄마 아빠, 아들 딸들의 한숨과 수고로움이 그 빛을 밝힌다. 

장관이 별나다고 소문난 한 경제부처 청사는 요즘 부쩍 밤늦도록 불 밝힌 사무실이 늘었다. 이렇게 주중 야근을 해도 일은 끝나지 않아, 얼마 전 출근길에 세상을 떠난 한 보건복지부 여성 사무관이 그랬던 것처럼, 휴일에 사무실에 나오는 공무원도 부지기수다. 극히 일부 부처를 제외하곤, 세종은 야근의 왕국이자 잔업의 천국이다.

낮이라고 편할까. 얼마 전 한 방송에 ‘공무원이 점심식사 시간을 안 지킨다’는 보도가 나가자, 각 부처 출입구에는 총리실에서 나온 감찰요원들이 점심시간이 넘어 청사로 들어가는 공무원을 단속하고 있다. 야근을 밥 먹듯 하는 한 경제부처 과장은 점심시간 복귀가 10분 정도 늦었다며 사유서를 걱정했다. 청사마다 하루 수십~수백명이 매일같이 법정 노동시간을 어겨가며 일을 하고 있지만, 노동부나 총리실이 공무원의 노동조건을 단속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 없다.

그럼에도 공직사회에 대한 일부 여론, 일부 언론의 인식은 여전히 ‘여유 있는 철밥통’이란 인식 수준에 머물러 있다. 민간의 엄혹한 고용상황과 비교해 한국을 ‘공무원만 살기 좋은 나라’라 평하기도 한다. 정년까지 직장에서 잘릴 위험 없고, 회사 망할 일 없고, 연금으로 노후가 보장된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런 지적은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잘리지 않고 노후가 보장된다는 ‘메리트’를 누리기 위해 감당해야 할 것들은 참으로 많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폐쇄적 조직문화, 국회나 언론 또는 상급기관의 일방적 갑질, 니들은 왜 영혼이 없느냐는 세간의 손가락질 등이 그것이다.

안타까운 점은 공무원의 잔업이나 야근이 국민의 권익이나 사회의 후생 증가로 제대로 이어지는 것 같지도 않다는 점이다. 부처마다 국민을 위하겠다며 각종 대책과 보도자료를 날마다 쏟아낸다. 이 대책으로 수혜를 입는 이들이 수만이고, 이 대책 덕분에 발생하는 경제적 효과가 수백억이라고 선전하지만, 이미 나왔던 대책의 반복이거나 대책 자체가 구두선에 그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사회 전체의 복리증진을 위해서라면, 대책을 한 번 덜 내고 공무원을 오후 6시에 칼퇴근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 야근하는 공무원 1,000명을 집으로 돌려보낼 수 있다면, 그 공무원 본인과 가족 등 적어도 3,000여명의 행복한 저녁 시간을 보장할 수 있다. 정부가 그토록 바라는 내수 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거액의 예산을 들여 아무리 머리를 짜낸다 하더라도 하루 수천명에게 즉각 효용을 발휘할 대책을 내놓기는 쉽지 않다.

저녁이 있는 삶은 공직사회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역설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공무원이 좀 더 편해지면 이 세상은 좀 더 살만한 곳이 될 지 모른다.

이영창 경제부 기자 anti09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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