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라면 으레 고개를 내젓는 이들을 위해 이런 속담이 있다. "마드리드를 한 번 본 적이 있다면, 천국에 갔을 때 여전히 마드리드를 보는 작은 창을 원할 것이다(De Madrid al cielo y un agujerito para verlo)". 미래에 있을 상처까지도 어루만지던 쿠엔카를 거쳐 생기로 펄펄 끓는 도시,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인생은 언제나 더하기, 그리고 빼기를 거듭한다. 마드리드 시내 한복판으로 숙소를 잡은 것은 천우신조였지만, 자연스레 주차 대란에 편승한 셈이었다. 일방통행, 신호등과 싸우던 사이 우리의 종착역은 유료주차장. 시간당 또박또박 금액이 오르는 이곳에 1일 주차요금 할인 따위는 없었다. 사실 마드리드만을 목적지로 삼았다면 차는 버리는 편이 좋았다. 어디든 저벅저벅 볼거리의 동선이 좋은 데다가 스페인의 수도답게 버스와 지하철, 택시 등 3대 교통수단을 여행자의 체력과 취향에 맞춰 편리하게 갈아탈 수 있기 때문이다.
도시는 역시 공기부터 다르다. 가볍고, 따갑고, 숨 가빴다. 바르셀로나에서 출발해 소도시인 테루엘, 쿠엔카를 거쳐 오랜만에 맞는 도시 냄새였다. 마드리드 역시 스페인의 얼굴마담으로 빠지기 힘든 축구와 플라멩코, 투우로 들썩인다. 지난 시즌부터 지네딘 지단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레알 마드리드’ 축구팀의 연고지요, 안달루시아(론다, 그라나다 등을 포함한 태양 가득한 스페인 남부 지역) 태생인 플라멩코의 톱 댄서와 연주자를 배출하는 플랫폼이 되어왔다. 위험과 학대의 논란 속에서도 투우의 열기는 3월말부터 10월초까지 이어진다. 5월 산 이시드로 축제(Fiesta de San Isidro) 때면 거의 매일 투우장(Plaza de Toros Monumental de las Ventas)은 피와 땀으로 뒤범벅된다. 하지만, 진정으로 마드리드를 ‘도가니 수도’라 지칭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연중무휴 무딘 사람도 놀라게 하는 광장과 미술, 그리고 황홀한 나이트 라이프가 이곳에 있다.
빈터의 천왕, 마드리드의 광장들
사전적으로 광장(廣場)은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게 거리에 만든 빈터’를 칭한다. 광장이 역이나 건축을 기점으로 만들어진 그 앞의 빈터로 이해할 때, 이 사전적 역할을 끔찍이 수행하는 게 바로 마드리드다. 특히 구시가지의 광장(plaza)은 대체로 ‘쉼’과는 거리가 멀고 차라리 펄펄 끓는다. 머리는 뜨거워지고, 몸은 이리저리 밀린다. 마스코트가 되는 동상이 세워져 있고, 1% 틈나는 곳마다 거리 공연이 펼쳐지며, 역사적 건축물을 기념사진으로 찍으려고 뒷걸음질 치는 이방인과 마드리예뇨스(madrileños, 마드리드 사람)의 어깨가 반드시 부딪히게 된다. 광장은 명실공히 마드리드 생기의 충전제다. 이곳에선 늘 사람들로 북적북적 기쁨의 리듬을 탄다. 빈터가 아니라 이 시대를 호령하는 사람들의 터다.
마드리드 여행의 포문도 푸에르타 델 솔(La Plaza de Puerta del Sol, 태양의 문)이란 광장으로부터 열린다. 동서남북 9개 갈림길의 시작과 끝이다. 공식적인 스페인의 배꼽으로, 밟으면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염원이 깃든 ‘0킬로미터(km 0)’ 바닥 표기는 반질반질 윤이 날 정도다. 자, 여행자의 옵션이 널렸다. 동쪽으로 가면 마드리드 영혼을 성숙시키는 프라도 미술관(Museo del Prado)과 부엔 레티로 공원(Parque del Buen Retiro), 서쪽으로는 호화로운 마드리드 왕궁(Palacio Real)이 마중 나온다. 북쪽으로는 쇼핑의 메카인 그란 비아(Gran Via)와 추에카(Chueca)로 연결되고, 남쪽으로는 마요르 광장(Plaza Mayor)을 포함해 스페인의 옛 번영을 보존한 로스 아우스트리아스(Los Austrias)로 힘 좋게 나아갈 수 있다. 아마도 세계 최대 거짓말은 마드리드에서 길을 잃었다는 것일 테다. 지도에서 느껴지는 그곳은 체감보다 가깝고, 길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연결된다.
해가 지면 팔딱팔딱 나이트 라이프
마드리예뇨스가 드라큘라의 피를 물려받은 게 아닐까 하는 억측은 화려한 밤으로부터 비롯된다. 온갖 건물의 전광판이 불꽃처럼 튀고, 레스토랑과 카페의 야외 의자는 인도를 좁아지게 한다. 특히 밤의 푸에르타 델 솔 광장은 혼자이거나 주머니가 가벼운 이들의 갈증을 씻겨준다. 특유의 유머로 관중을 사로잡는 댄스 브레이커와 만담꾼의 출연 때문인데, 여기서 마드리예뇨스의 중요한 습성이 발각된다. 거리 공연을 둘러싼 누구도 ‘얼마나 잘하나 보자’는 식의 심사위원형 눈빛만 쏘지 않았다. 다수의 이방인과 이민자로 구성된 마드리예뇨스가 선보이는 건 사교성이다.
예를 들면, 한 힙합 댄서가 연속 촬영을 하는 내게로 군인처럼 다가오더니 위트랍시고 티셔츠를 가슴 끝까지 추어올렸다. 카메라를 잡은 손은 극도의 수전증으로 떨리고, 이대로 도망가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그때 바로 앞 백발의 할아버지가 - 본인에게 오는 줄 알고 - 그와 똑같이 올챙이배를 드러내며 응수했다. 이유야 저마다 달랐겠지만 두통이 올 때까지 웃었다. 밤의 광장은 ‘모두가 함께’란 신적인 경지에 닿아 있었다. ‘네가 마드리드에 있다면, 넌 마드리드 출신이야’란 풍문에서 나만 실격이었다.
한편, 다른 때깔의 밤은 역시 추에카(chueca)가 책임진다. 잡지에서 튀어나온 모델과 게이의 요충지로, 대부 격인 바(bar)들이 밤에 고개를 든다. 게이 커뮤니티가 있는 이곳은 트렌드와 스타일에 각을 세우고 잘 노는 오빠, 언니의 영감이 거리를 도배하고 있다. 모던한 디자인 건물에 들어선 산 안톤 시장(Mercado San Antón)의 푸드 코트에서 적당히 배를 채우고 추에카 광장(Plaza de Chueca) 근방의 앤젤 시에라(Taberna Angel Sierra) 같은 펍에서 목청 터지는 분위기에 심취한다면, 마드리드에서의 기억할만한 하룻밤은 보장된다.
미술이란 승부수, 황금의 박물관 삼각지
마드리드로 전세계인을 불러모으는 주역 중 하나로 미술을 빼놓을 수 없다. 마드리드의 3대 미술관으로 각축을 벌이는 주인공은 프라도 미술관(Museo Del Prado)과 레이나 소피아 미술 센터(Centro de arte Reina Sofía), 그리고 티센-보르네미차 미술관(Museo Thyssen-Bornemisza). 영민한 컬렉터의 사적인 작품 취향을 훔쳐보는 티센-보르네미차나 현대 걸작품을 전시한 레이나 소피아 미술 센터 사이에서 프라도 미술관은 삼각지의 으뜸이자 세계 최고 수준으로 쳐준다. 박물관 문을 닫기 2시간 전, 왜 그리 자신 있게 무료입장을 허하는지도 이해된다. 1785년 완공된 네오 클래식 스타일의 옛 왕궁에, 왕실 소장품은 물론 천문학적 가격이 매겨진 고야와 보쉬, 벨라스케스, 엘 그레코, 디에고 로드리게즈 등 남녀노소를 만족시킬만한 회화의 질과 양으로 꽉꽉 채워 하루만의 독파는 불가능에 가깝다. 총 2층 구조로, 12~19세기 초에 걸쳐 화가와 지역에 따라 안배했다. 팸플릿에 표기된 걸작만 해도 경보로 감상해야 하니, 무료 입장하는 꼼수도 써가며 매일 여러 번 압도당하는 걸 추천한다. 이외 3대 박물관의 그림자에 가려진 70여개 박물관도 으르렁댄다. 그 중 1만 3,000여 점의 작품을 보유한 라자로 갈디아노 박물관(Museo Lázaro Galdiano)과 그래피티, 사진을 포함한 현대 예술의 경지를 맛보는 모리아티 갤러리(Galería Moriarty) 역시 여행 리스트에 올리지 않으면 좀 섭섭하다.
낮엔 미술관의 포효에 응하고, 밤엔 들썩이는 광장을 기웃거렸다. 만일 천국에서 마드리드로 난 창을 원할 것이냐 묻는다면, 이리 답하는 수밖에. “당연히!”
여행 칼럼니스트 강미승 frideameetssomeo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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