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렛 뎀 인”(Let them inㆍ그들을 입국시켜라), “디스 이즈 낫 데모크라시(This is not democracyㆍ이건 민주주의가 아니다).”
29일 오후 4시 미국 수도 워싱턴의 관문인 덜레스 국제공항 1층 국제선 입국장. 500명이 훨씬 넘는 미국 시민들이 경찰이 설치한 경계선 밖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반(反) 이민행정 명령’을 규탄하고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27일 7개 아랍국가 출신자의 입국을 잠정 중단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자마자, 중동과 미국 공항 전역에서 무슬림 여행객들의 발이 묶이는 사태가 잇따랐기 때문이다.
이들은 저마다 집에서 만들어온 ‘바보 트럼프’, ‘우리는 당신들과 함께 한다’, ‘모든 입국자들을 환영한다’ 등 트럼프 대통령의 조치를 조롱하는 푯말을 들고 있었다. 휴일인데도 공항에 나온 시민들은 인종ㆍ성별 구별이 없었다. 행정명령의 최대 피해자로 떠오른 무슬림 시민들은 물론이고 유럽계 미국인, 아시아계 미국인이 모두 무슬림 입국금지 조치를 비난했다.
일본인 부부로 보이는 한 시위 참가자는 1930년대 미국 입국이 좌절돼 독일로 송환된 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숨진 유대인 소년의 사연을 담은 피켓을 들고 나와 트럼프 대통령 조치의 ‘반 인도주의적’ 속성을 공격했다. 스스로를 케이트라고 소개한 한 여성은 아랍어로 ‘무슬림 입국을 금지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적힌 피켓을 들고 있었다. 그는 “트럼프가 잘못을 고치기 전까지 시위를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입국이 금지된 무슬림 여행자를 돕기 위해 ‘재능 기부’에 나선 변호사도 있었다. 로렌 에단 변호사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내게 연락하라”는 푯말과 함께 있었다. 그는 “공항 입국 심사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누군가 억울하게 발이 묶인다면 즉석에서 도와주기 위해 나왔다”고 말했다.
입국장 정면에서 시위를 벌인 아랍계 미국 시민 파이트씨는 “트럼프가 미국을 안전하게 하기 위해 무슬림 입국을 금지시켰다고 주장하지만, 오히려 미국을 더 위험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가뜩이나 친 이스라엘 색채를 보인 트럼프가 이런 식으로 무슬림을 차별한다면, 중동 지역에서 미국에 대한 반감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수 백여명 시위대가 몰려 입국장에서 혼잡이 빚어졌지만, 경찰은 평화 시위를 철저히 보장했다. 입국장 입구부터 공항 출입문까지 100여m에 설정한 통제선 밖으로 일부 시위대가 간간히 넘어와도 제자리로 돌아가라는 말만할 뿐 강하게 제지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의 ‘반 이민행정 명령’에 항의하는 시위는 주말 내내 미 전역에서 이어졌다. 뉴욕 존 F. 케네디 공항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이틀 연속 이어졌고, 수도 워싱턴의 백악관과 트럼프호텔 앞에서도 군중 들이 몰려 들었다.
시민들의 항의와 공화당 일부에서도 트럼프 대통령 조치에 문제를 제기하자, 트럼프 정권도 한 발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시위가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29일 오후 성명을 발표, “이번 조치는 언론이 선동하는 것처럼 무슬림 입국을 금지한 것이 아니라 대 테러 대책의 일환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또 다급해진 탓인지 전임 버락 오바마 대통령까지 끌어들였다. 그는 “오바마 대통령도 2011년 이라크 난민에 대한 비자 발급을 6개월간 중지했었다”며 “이번 조치도 그와 똑 같은 것”이라고 강조했다.
레인스 프리버스 백악관 비서실장도 “무슬림 입국 금지는 미 영주권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한발 물러섰다. 이는 이란과 두바이에서 미 영주권자의 비행기 탑승이 전면 금지된 것에 대해 비난이 거세지자, 나온 것이다.
워싱턴=조철환특파원 chch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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