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인에게서 거액 받아 챙겼나
“박연차 리스트에 이름” 증언
潘, 일기장까지 꺼내 들고 반박
野 “자신 있으면 형사 고소를”
美검찰에 기소된 첫째 동생父子
둘째 동생은 형 팔아 사업 의심
모른척했거나 몰래 돕지 않았나
“면목 없지만 알지 못하는 일”
“공직 생활 40년간 모범이 되려 했고 검증의 검자도 (내게) 해당 안 될 거라 생각했다.”
25일 열린 올해 첫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국민에게 면목이 없다”며 밝힌 심경이다. 반 전 총장은 총장 재직 시절부터 유력한 대선 주자로 꼽혀왔다. 외교 관료로서의 업적은 더없이 찬란하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한국인 중 하나다.
그러나 10년 만에 돌아온 고국에서 반 전 총장은 기대만큼 환대 받지 못하고 있다. 이는 대권 도전을 선언하고 정치인으로 변신하면서 스스로 검증 도마에 올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껏 제기된 굵직한 의혹은 두 가지다. 반 전 총장 자신이 기업인에게서 거액을 받아 챙겼다는 것과, 자기 이름을 내세운 피붙이들의 불법 행각을 모른 척했거나 도왔다는 것이다.
23만달러 수수? “알리바이 확실”
사실로 드러날 경우 반 전 총장에게 가장 치명타가 될 의혹은 그가 두 차례에 걸쳐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한테서 23만달러(약 2억8,000만원)를 받았다는 주장이다. 지난해 12월 24일 주간지 시사저널은 박 전 회장이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5월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이던 반 전 총장에게 서울 한남동 외교장관 공관 집무실에서 베트남 외교장관 일행 환영 만찬이 시작되기 1시간 전인 오후 6시쯤 20만달러가 담긴 쇼핑백을 건넸다고 보도했다. 또 2007년에는 유엔 사무총장 취임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3만달러를 줬다는 의혹도 제기했다.
반 전 총장이 12일 귀국 직후 기자회견에서 “박연차가 내게 금품을 전달했다는데 내 이름이 거기에 왜 등장하는지 알 수 없다”고 부인했지만 의심은 간단히 해소되지 않았다. 외려 반 전 총장에게 불리한 보도가 이어졌다. 한겨레는 1월 18일자에서 “박 전 회장이 돈을 건넨 인사들을 정리해 2009년 대검 중수부에 제출한 ‘박연차 리스트’에 반 전 총장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팩트”라는 검찰 관계자들 증언을 인용했다. 야당도 “사실이 아니라면 해당 언론사를 명예훼손죄로 고소해 보라”며 압박했다. 고소가 이뤄질 경우 박연차 리스트가 공개돼 진위 여부가 국민 앞에 자연스레 드러날 거란 논리다.
사정이 이렇자 반 전 총장 측 대응도 적극성을 띠기 시작했다. 반 전 총장의 법률대리인 격인 박민식 전 새누리당 의원이 23일 반박 기자회견을 연 것이다. 가장 자신 있게 제시된 반증은 알리바이(현장부재증명)다. 두 사람이 기사에 쓰인 시간과 장소에 동시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아주 희박하다는 얘기다. 박 전 의원에 따르면 당일 반 전 총장은 만찬이 시작되기 직전인 오후 6시 40~50분쯤, 박 전 회장은 1시간 뒤쯤 각각 공관에 도착한 데다 공관엔 집무실이 없다. 때문에 오후 6시쯤 집무실에서 돈이 오갔다는 기사의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돈을 주고 받았을 리가 없다는 정황의 증거로 박 전 의원은 반 전 장관의 일기장까지 공개했다. 당시 반 장관은 “손님 중 부산에서 사업하면서 베트남 명예총영사로 근무하는 사업가(박 전 회장)인 회장을 초청했는데 이 분은 (노무현) 대통령의 후원자라서 그런지 태도가 불손하고 무식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불편해하는데도 공식 만찬에서 폭탄주를 돌리라고 강권하고 혼자 큰 소리로 떠들어대는 등 분위기를 완전히 망쳐버렸다”며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박 전 의원은 “박 전 회장 이름이 빈칸인 건 반 전 총장이 몰랐기 때문”이라며 “그날 20만달러를 준 사람을 혹평한다는 게 상식에 맞느냐”고 반문했다.
관훈 토론회에서 반 전 총장은 “법률자문인이 확실하게 객관적인 사실을 들어 설명했다”고 자신감을 내비쳤지만 아직 논란이 깔끔하게 정리된 건 아니다. 박범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4일 기자간담회에서 “일기장에 폭탄주나 (박 회장) 품성을 말한 게 돈을 안 받았다는 증거가 되느냐. 그런 수사와 재판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며 “문제가 있다면 형사로 고소하고 정면 승부하라”고 촉구했다. 그러자 박 전 의원은 이튿날 MBC 라디오에 출연, “금명간에 반드시 고소 절차에 들어갈 걸로 안다”고 대응했다.
일부 의혹의 경우 보도한 언론사로부터 사과를 받아냈다. 반 전 총장이 2006년 외교통상부 장관 퇴직 시 재산을 축소ㆍ누락 신고했다는 한겨레의 1월 25일자 보도에 대해서다. 반 전 총장 측은 곧바로 “재산 누락이 없었고 규정에 따라 신고했으므로 재산을 축소 신고할 의도도 없었고 이후 정정할 기회가 없었다”는 반론 보도자료를 냈고, 이에 한겨레가 이튿날 “기자의 착오로 잘못 보도됐다. 반 전 총장과 독자에게 사과 드린다”고 정정 보도했다.
동생들 호가호위? “상관없는 일”
반 전 총장의 첫째 동생 기상씨와 조카 주현씨가 미국 연방검찰에 의해 뇌물공여와 자금세탁, 사기 등 12개 혐의로 기소된 것도 반 총장에겐 상당한 부담이다. 공소장에 따르면 반씨 부자는 2013년부터 2015년까지 경남기업의 베트남 소재 건물 ‘랜드마크72’ 매도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 중동국가 관리에게 뇌물을 주기로 계획하고 실제 브로커에게 일부를 건넨 혐의다. 미 검찰은 선금인 50만달러가 한국에서 뉴욕에 있는 은행 계좌로 2014년 4월 송금된 사실을 확인했다. 매매 뒤 주기로 한 돈은 물경 200만달러다. 미 검찰이 한국 정부에 기상씨 체포를 요청한 사실이 20일 알려지면서 여야가 한 목소리로 반 전 총장에게 명확한 해명을 요구하기도 했다.
반 전 총장은 “면목이 없다”면서도 의혹 내용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다”고 선을 긋고 있다. 그는 관훈 토론회에서도 기상씨 부자가 미 검찰에 의해 기소된 데 대해 “엄정한 법 절차에 따라 그대로 (수사를) 해야 한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동생이 불미스러운 일을 벌였지만 그 자체로 곤혹스러울 뿐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태도를 명확히 한 것이다. 동생에게 연락해 자초지종을 파악하거나, 미 검찰의 체포 요청에 응해 미국에 가라고 권유할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엔 “혹시 제가 불필요한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비난을 받기 싫어서 귀국해 만나지도 않았고, 이상할까 봐 일부러 전화도 안 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반 전 총장이 어떤 식으로든 사건에 연루됐을 거라고 짐작하게 할 만한 정황이 없는 건 아니다. 12일 JTBC는 기상씨 부자가 사기극을 벌이고 있던 시기인 2013년 8월 27일 오전 9시15분에 롯데호텔에서 반 전 총장이 고(故)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과 독대한 기록이 성 전 회장 다이어리에 남아 있다고 보도했다. 전날에는 반 전 총장이 성 전 회장이 회장을 맡고 있던 충청포럼 행사에도 참석했다. 이에 대해 반 전 총장은 역시 관훈 토론회에서 “기억이 안 나지만 성 회장과 몇 번 만난 건 사실이다. 장관 때부터 알았다. 저한테 도움을 주려고 하셨다”면서도 “특별한 관계는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독대 기록에 대해서도 “롯데호텔에서는 여러 사람이 같이 만났다. 국회에서도 (따로) 만난 걸로 돼 있는데 부정확한 거다. 국회에서 연설이 끝나고 갈 데가 없으니 가족과 함께 귀빈 식당에서 식사를 했는데 오찬 한 것으로 돼 있지만 저는 가족과 했고 그분은 다른 사람들과 했다”고 반박했다.
둘째 동생 기호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기호씨는 2010년 신재생에너지 업체 KD파워의 대표가 됐는데 이 업체는 2012년 유엔을 등에 업고 미얀마에 진출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미 유엔 전문매체로 알려진 ‘이너 시티 프레스’ 소속 매튜 러셀 리 기자가 최근 국내 언론들을 통해 폭로한 바에 따르면, 기호씨는 유엔 대표단을 자처하며 사업을 벌였다. 리 기자는 “반 전 총장이 그의 가족한테 이익을 주려고 유엔을 이용했다”고 주장한다. 기호씨가 거쳐간 상장사 주식 가격이 반기문 테마주로 분류돼 출렁일 때도 의심의 시선이 많았다.
하지만 반 전 총장은 단호하다. “모른다. 미얀마에서 사업을 한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유엔과 무관하다. 유엔이 추구하는 일 중 하나가 에너지 태양광 기술을 개발하고 개도국에 원조를 하는 일이어서 각국 비즈니스맨들을 많이 만난다. 그게 무슨 유엔 사무총장 지위를 이용한 것이었겠나. 구체적인 내용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관훈 토론회 해명)는 것이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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