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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한국인을 모르는 한국 정치인

입력
2017.01.25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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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의 성품을 ‘빨리빨리’와 ‘은근과 끈기’로 설명하면 모순이 아닐까. 여기에 냄비근성까지 들먹이면 아득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설명의 단서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에 따르면, 사람은 오랜 역사에서 반복된 의식주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주식인 빵과 밥의 차이를 보자. 빵의 재료인 밀을 경작하려면 2~3년에 한 번씩 땅을 묵혀야 하는데, 이때 가축을 키울 수 있다. 쌀농사만 짓던 한국과 달리 유럽에 목축이 성행한 까닭이다. 그뿐 아니다. 빵과 밥을 만드는 차이는 자연스럽게 생활에 차이를 만들고, 행동과 심리에도 차이를 만든다. 이는 그대로 집단무의식으로 남게 된다.

한국인의 성품을 알자면 식보다 주가 중요하다. 한옥이 특이해서다. 일반적으로 건축이 공간을 나누는 작업이라면, 한옥은 시간을 나누는 데 초점을 둔다. 아침에 일어나 이불을 개면 밥상이 들어오고, 밥상이 나가면 아이가 책을 펼친다. 방 하나를 침실에서 식당으로 다시 공부방으로 계속 바꾸어 쓴다. 빨리빨리 문화는 여기에서 시작한다. 모두가 기상해야 밥상이 들어올 수 있어서 누군가 게으름을 피우면 생활이 곤란해지고, 가족 모두의 스케줄이 엉망이 된다. 공동의 스케줄 속에서 생활하는 한옥은 ‘빨리빨리’가 입에 붙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빨리 달아오르고 빨리 식는 냄비근성과 비교하면, ‘빨리빨리’는 방향성 있게 지속된다는 점에서 전혀 다르다.

여름 한옥은 마당을 쓰는 넓은 집이지만, 겨울엔 온 가족이 방 하나에서 견뎌야 한다. 우리는 시간(계절)마다 큰 공간 차를 감내하면서 은근과 끈기를 체득했다. 물론 은근과 끈기의 뿌리는 구들이다. 구들은 금방 불붙는 벽난로와 달리 바닥이 달궈지기를 끈기 있게 기다려야만 은근한 따뜻함을 누릴 수 있다. 신라시대 아자방은 구들을 데우는 데만 며칠씩 걸렸다. 생활에선 서로를 빨리빨리 몰아붙이지만, 그 바탕에는 은근과 끈기가 있다. 언뜻 모순된 성품이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었다.

냄비근성은 사실 정치인이 만들었다. 정치인의 욕망이 밖으로 나와 현상이 된 것이다.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는 모 의원의 말에선 정치인의 간절한 욕망이 느껴진다. 대통령 역시 탄핵 인용을 늦추려 애쓰며, 냄비 민심을 기대하는 눈치다. 하기는 국민의 냄비근성에 확신이 없었다면, 위안부 협상을 그렇게 얼렁뚱땅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재용씨의 영장을 기각시킨 조의연 판사 역시, 정경유착을 끊어야 한다는 국민의 요청에, 그러다 말겠지 믿는 것이다.

국민에게 충격과 혼란을 준 세월호 역시 ‘빨리빨리’를 냄비로 오해한 예다. 참혹한 사고로 슬픔에 빠졌던 국민 중 많은 이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희생자 가족에게 적의를 보였다. 정부가 일부 언론과 함께 냄비 민심을 유도한 결과였다. 정부가 아이들을 죽게 방치했을 리 없다고 국민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은 무의식적으로 공동의 스케줄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늘 바쁘다. 오죽하면 장례식에 가서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말할까.

정치인은 국민이 냄비이길 바라지만, 국민은 정치인이 냄비이길 원하지 않는다. 냄비 개헌에 반대하는 이유다. 오늘 나라 꼴은 대통령제 때문이 아니라 법치주의가 확립되지 않아서다. 국민에겐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나 개헌보다, 인적 물적 적폐 해소가 중요하다. 200석 야당은 대통령도 할 수 없는 일을 당장 할 수 있다. 헌법이 아니라 법률로만 할 수 있는 일들이다. 지금 안 하면 대통령이 돼도 개헌이 돼도 안 한다. 추운 날씨에도 국민이 정치인에게 ‘빨리빨리’ 독촉하는 이유다. 무엇이 밥상을 막고 우리 스케줄을 망치는지 명확하잖은가?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려면 시간이 얼마 없다. 서두르자. 정치인은 한국인의 ‘빨리빨리’가 냄비가 아니라 은근과 끈기에 터 잡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상현 한옥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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