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눈이 내리고 한파가 닥치면 늘 머릿속을 맴도는 시가 있다. 최승호의 ‘대설주의보’다.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눈발 휘몰아치는 산골 풍경을 묘사한 이 시는 1983년 발표됐다. 계엄사령관에서 대통령으로 자리 바꾼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이다. 그래서 ‘백색의 계엄령’은 한겨울 스케치로만 읽히지 않는다.
▦ 5ㆍ18 민주화 운동 당시 계엄군이 헬기에서 시민을 향해 총격을 가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보고서가 최근 나왔다. 저항하던 시민들이 있던 광주 전일빌딩 10층에서 발견된 총탄 흔적이 헬기 같은 비행체에서 발사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국과수는 주로 소총 탄흔으로 보면서도 당시 헬기인 UH-1 500MD에 장착된 기관총 M60 사격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5ㆍ18 즈음에 작성돼 기밀 해제된 미 중앙정보국(CIA) 문건에서 당시 북한군의 개입이 눈에 띄지 않았다는 내용도 확인됐다. 이 사안은 우리 국방부도 같은 견해를 내놓았지만 일부에서 끊임없이 “북한군 600~1,200명 개입”을 주장해 소송까지 벌어져 있다. 이런 안타까운 역사와 논란이 사실상 민의를 짓밟은 계엄에서 촉발됐다.
▦ 요즘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는 이른바 ‘태극기 집회’ 등에서 “계엄령 선포하라” “군대여 일어나라” “탄핵되면 폭동이 나고 우리가 혁명 주체세력이 될 것”이라는 구호와 주장이 나온다고 한다. 박정희 정권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후 발표한 유신 헌법 초안 작성에 평검사로 참여했던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어버이연합 관제 집회를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의심을 사고 있는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마침 나란히 구속된 것을 생각하면 이들의 시대착오가 이만저만 아니다.
▦ 정치권력이 자신들과 생각이 다르고 또 권력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특정인들에게 불이익을 주다 법의 단죄를 받는 시절에 “계엄”이 가당하기나 한가. 무력을 동원한 전체주의적 시민 통제는 지난 역사로, 시어의 수사만으로 족하다.
김범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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