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다니던 스무 살 무렵의 어느 날. 첫 수업을 마치고 다른 강의실을 향해 서둘러 가고 있었다. 통로 끝에서 출입문을 열고 건물과 건물 사이의 구름다리로 들어서면서, 그 해 겨울 처음으로 내리는 눈을 보았다. 첫눈이라는 게 흔히 그렇듯, 먼지처럼 흩날리다가 땅에 닿으면 사라지는 눈이었다. 삼십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기억에 남을만한 풍경은 아니었다.
다만 그 미약한 눈발 속에 특별해 보이는 사람 하나가 서 있었다. 짧은 머리카락을 꼭 여며 참새 꽁지처럼 묶은 내 또래의 여학생. 붉게 얼은 뺨 위로 머리카락 몇 가닥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주위에는 희끄무레한 연기가 맴돌고 있었다. 도서관 앞 벤치에서 담배를 피우던 여학생이 복학생에게 따귀를 맞았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떠돌던 시절이었다. 천천히 스쳐지나가면서 그녀를 훔쳐보았다. 잔뜩 웅크린 어깨와 난간 바깥쪽을 향해 뻗어 있는 팔목과 가냘픈 손가락들이 보였다. 엄지와 검지로 잡고 있던 짤막한 담배를 가져와 절박하게 연기를 빨아들였다가 토해내는 몸짓도. 나는 몇 발자국 더 걷다가 뒤돌아보았다. 농축된 진지함이 담긴 그녀의 눈망울과 마주쳤고 나는 압도당했다. 성긴 눈송이 사이로 사라지는 뿌연 연기가 신비해 보이기까지 했다. 담배를 피워 보고 싶다는 마음이 처음 들었던 순간이다.
아니, 그게 처음은 아니었다. 심심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어린 시절, 친구와 내가 담벼락 사이의 좁은 공간으로 숨어 들어간 적이 있었다. 우리 손에는 담배 한 개비와 팔각 성냥 한 통이 들려 있었다.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원래 담배는 남아메리카의 샤먼들이 신탁을 받으려 사용하던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사나운 짐승과 마법을 막아내기 위한 것이라고도 하지 않던가. 물론 불꽃과 연기를 뿜어내는 물건에 아무나 손을 댈 수 있었을 리 없다. 그런 물건이 어린 아이들의 호기심에 바쳐지는 제물이 될 수 있을 만큼 흔해졌다는 것은 이미 고유의 신성을 잃었다는 증거다. 신성이 독성으로 변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아무려나 친구와 나의 흡연 시도 또한 그 시작은 창대했으나 결과는 참담했다. 우리는 며칠 전 막걸리에 설탕을 타서 몰래 마셨던 모험이 몇 배 짜릿했다는 결론을 내린다.
자주 들락거리던 온라인 영화 관련 게시판이 있었다. 언젠가 그곳에 길거리에서 누군가가 턴 담뱃재가 날아와 손등을 델 뻔 했다는 내용의 글이 올라왔다. 그러자 길거리 흡연이 얼마나 뻔뻔한 짓인지, 얼마나 심각한 범죄로 발전할 수 있는지 성토하는 댓글들이 줄줄이 달렸다. ‘일본에서는 길거리에서 흡연을 하던 사람의 담배 불똥이 튀어 뒤에 오던 어린아이가 실명한 사례가 있습니다. 길거리 흡연은 잠재적 살인행위에요.’ 나는 무심코 댓글을 달았다. ‘그러면 교통사고의 위험을 안고 있는 모든 자동차 운전자들도 잠재적 살인자이지요.’ 그 이후 댓글들이 나를 향해 집중포화를 퍼붓기 시작했다. 이렇게 저렇게 변명했다. 나는 흡연자가 아니고, 흡연은 백해무익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흡연자를 잠재적 범죄자라고까지 할 수 있느냐,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전혀 피해를 안 입히고 살 수 있느냐. 물론 어찌 보면 맥락에 닿지 않는 애매한 말들이다. 댓글들은 본 적도 없고 이름도 모르는 나를 비난하며 조리돌림 하기 시작했다. 정작 하고 싶었던 말은 끝내 하지 못했다.
한적한 길모퉁이를 돌아서다가 불안정하기도 하고 공허하기도 한 눈빛으로 담배를 들고 멈춰 서 있는 사람들과 마주칠 때의 느낌, 설명하기 힘든 그 느낌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나쁜 사람이 될지 좋은 사람이 될지 굳이 결정하지 않아도 되는 서성임 같은 그 느낌이 주는 안도감에 대해서도. 나 아닌 누군가를 숨 가쁘게 나쁜 사람으로 몰아가기 전 잠깐 멈춰 서서 주머니를 뒤적여 보는 유예의 시간이 아쉽다는 말도.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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