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소재 A대 컴퓨터공학과 2017학년도 입학 예정 신입생은 총 15명. 하지만 이들이 포함된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신입생 단체대화방’에는 현재 23명이 활발히 대화 중이다. 진짜 새내기 15명을 제외한 나머지 8명의 정체는 신입생으로 위장한 같은 학과 선배들이다. 정작 신입생들은 지금도 이 사실을 모른 채 23명의 동기가 입학식을 치를 거라 믿고 잦은 온라인 대화로 우정을 쌓고 있다.
위장 신입생들이 신입생 친목용 SNS에 잠입하고 있다. 선후배 간 정서적 거리를 미리 좁히고, 새내기들의 빠른 대학생활 적응을 돕기 위한 선의라는 게 신입생 행세를 하는 재학생(선배)들의 얘기다. 반면 상하관계라는 틀에 얽힌 악습의 변질, 지나친 엿보기 문화, SNS 갑(甲)질이라는 지적도 따른다.
선배들은 자신의 경험에 기대 긍정적인 면을 부각한다. 올해 위장 신입생 역할을 하고 있는 재학생 이모(20)씨는 “대학에 입학한 작년 초 단체대화방에서 친해진 동기가 학생증으로 결제를 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는데, 알고 보니 선배였다”고 말했다. 그는 “동기일거라 철석같이 믿었던 실제 동기들이 당황했지만 미리 친해진 덕에 수강 신청부터 동아리 가입까지 그 선배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며 “나도 올해 똑같이 하기로 했다”고 했다. B대 인문계열 재학생 중 일부도 지난해 12월부터 가명으로 SNS 계정을 새로 만들어 예비 신입생 행세를 하고 있다. 위장 신입생 장모(20)씨는 “후배들의 학교 적응을 도울 생각에 들떠있다”고 했다.
예비 신입생들은 부작용을 우려한다. 정모(19)씨는 “신입생 단체대화방은 학교생활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이성관계나 가정형편 등 동기라는 유대감 속에 허물없이 터놓는 사적 정보도 공유하고 있다”며 “선배가 이런 대화들을 동의 없이 지켜보고 있다는 건 또 다른 형태의 갑질”이라고 주장했다. 예비 신입생 주도로 ‘프락치(첩자) 선배 색출’이 시작되면서 얼굴도 못 본 선배들과의 갈등이 빚어지고 있는 학교도 있다.
과거에도 다양한 형태의 위장 놀이가 대학가에 존재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위장 아이디로 가입해 후배들 모임에 나간다거나, 학기초에 신입생 학번이 적힌 학과 점퍼를 입고 다니는 식이다. 이런 엿보기 문화는 학내 군기잡기 등으로 변질되면서 차츰 사라지는 추세였다.
그러다 최근 몇 년 사이 SNS 발달로 소통 채널이 다양해지면서 또 다른 부작용을 만들어내고 있다. 지난해 한 대학에선 선배들이 포함된 단체대화방에서 ‘인사 때 관등성명’ ‘문자메시지 등을 보낼 때 마침표 찍기’ ‘선배들 말에 10초 이내 전원 답하기’ 등 도를 넘은 통제가 문제가 되기도 했다.
김석호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엿보는 입장에선 놀이 문화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충분히 ‘SNS 갑질’이라 생각할 수 있는 일”이라며 “신입생들은 물론 재학생들도 인권감수성이 부족한 시기라, 선의라 하더라도 타인에게 큰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형준 기자 mediaboy@hankookb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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