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이 쓰러졌을 때보다 더 위기다.”
지난 16일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뇌물공여 등 혐의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했던 당시 삼성 내부 분위기는 초상집처럼 가라앉았다. 1938년 창업 후 수 차례 검찰 수사를 받았던 삼성이지만, 그룹 총수에 구속영장이 청구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불과 3일 후인 19일, 이 부회장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깔끔한 모습으로 유유히 서울구치소 문을 나왔다. 서울중앙지법이 특검팀이 청구한 영장을 기각한 직후였다. 조의연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뇌물 범죄의 요건이 되는 대가관계와 부정한 청탁, 각종 지원경위에 관한 구체적 사실관계 등을 포함한 현재까지 수사 내용에 비춰볼 때 구속 사유와 필요성, 상당성(타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기각사유를 밝혔다.
삼성은 큰 고비를 넘겼다. 그러나 특검과 삼성의 대결은 아직 1라운드를 마쳤을 뿐이다. 특검팀은 흔들리지 않고 수사를 진행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밝혔다.
수많은 의혹에도… 구속영장 청구조차 처음
삼성그룹 창업 79년, 그 동안 검찰의 칼끝은 수 차례 총수들을 겨눴다. 범죄 혐의가 밝혀져 총수가 집행유예 처분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유독 ‘이병철-이건희-이재용’으로 이어지는 삼성가 직계에 대한 수사에서는 ‘구속’이라는 단어가 보이지 않았다.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가 최초의 일이다.
삼성의 창업주인 고(故) 이병철 초대회장은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위기에 몰렸다. 계열사인 한국비료가 인공 감미료인 사카린 약 55톤을 건축 자재로 속여 밀수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이 전 회장은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고 경영에서 은퇴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비난 여론을 빠져 나왔다. 당시 이 전 회장의 차남 이창희 한국비료 상무가 구속돼 6개월간 수감생활을 했고 장남인 이맹희가 경영 일선에 나섰으나 이 초대회장은 3년 만에 경영에 복귀했다.
이건희 회장 역시 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조성, 2008년 에버랜드 전환사채(CB) 저가 발행 등 의혹으로 수 차례 검찰 수사를 받았다. 이 회장은 각 사건의 혐의가 인정돼 집행유예 판결을 받기도 했지만 검찰은 수사 중에도 결코 구속 카드는 꺼내지 않았다. 사유는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 재계 1위 삼성의 수장이 구속될 경우 경영 공백으로 인한 그룹과 국가 전체의 파장이 클 것이란 이유였다.
이 부회장을 겨눴던 특검팀 역시 경영 공백으로 인한 여론의 역풍을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부회장과 함께 뇌물 공여에 핵심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는 최지성 미래전략실장(부회장) 등 3명의 고위 임원에 대해서는 불구속 수사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고위 임원들이 모두 구속될 경우 생길 사회적 파장을 고려한 것이다.
3번의 독대, 430여억원의 진실
그럼에도 특검팀이 이 부회장을 구속하려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규철 특검보는 16일 구속영장 청구 결정을 밝히면서 “국가 경제 등에 미치는 상황도 중요하지만 정의를 세우는 일이 더욱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한다. 박 대통령의 뇌물수수혐의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이 부회장의 혐의를 규명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특검팀이 주목하는 것은 2014~2016년 사이에 이뤄진 이 부회장과 박 대통령의 세 번의 독대다. 지금까지 수사된 바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2014년 9월 15일 첫 독대 당시 “삼성이 대한승마협회 회장사를 맡아달라”며 최순실(61ㆍ구속기소)씨의 딸 정유라(21)씨에 대한 우회적 지원을 요청하는 등 최씨 일가와 관한 여러 요구를 했다.
특히 의혹의 핵심은 2015년 7월 25일 이뤄진 2차 독대다. 두 번째 만남은 국민연금이 주주총회에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찬성한 이후 이뤄졌다. 박 대통령은 이날 이 부회장에게 “우리 정부 임기 안에 삼성의 후계 승계 문제가 해결되기 바란다”며 미르ㆍK 스포츠재단 출연을 요구했다. 이후 2015년 9월부터 최씨의 일가에 대한 삼성의 지원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삼성이 최씨의 독일 회사인 코레스포츠와 미르ㆍK재단 등에 지원한 금액은 총 430여억원에 이른다.
삼성은 3차례 독대를 둘러싼 의혹들에 대해 “강요ㆍ강압에 의한 것”이라며 자신들은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특검은 이 부분이 이 부회장 뇌물죄의 핵심이라고 본다.
특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특검이 롯데, SK등 ‘최순실 게이트’를 둘러싼 여러 대기업 중 삼성을 가장 먼저 수사한 것은 혐의 입증이 가장 확실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심만만하게 진행한 첫 수사부터 차질이 생기면서 특검은 앞으로의 수사에 부담을 가질 수 밖에 없게 됐다.
하지만 삼성이 아직 긴장을 놓을 때는 아니다. 이 특검보는 19일 기자회견을 통해 “구속영장이 기각됐다고 해서 혐의가 없는 것 아니다”라며 “이 부회장에 대한 영장 재청구는 내부 검토 후 향후 결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특히 영장 기각과 상관없이 2월 초순에는 박 대통령에 대한 소환 조사를 반드시 하겠다는 계획을 밝혀 진실을 파헤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특검이 이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재청구하지 않고 불구속 수사를 할 경우 삼성 총수의 불구속 역사는 계속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여태까지 삼성가에 대해 이뤄진 수사 중 가장 강한 수사의지를 갖고 있는 특검인 만큼, 특검과 삼성 간의 ‘세기의 대결’ 결과는 끝까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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