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국 때문에 뺄 필요 없다”
더 킹, 노무현 탄핵 가결 영상서
朴 웃는 장면 고민 끝 삭제 안 해
“시국과 너무 닮아서 삭제”
판도라, 무능한 대통령 모습 등
되레 영화 의미 바랠까 가위질
‘현실이 더 영화 같다’는 상투어가 더할 나위 없이 들어 맞는 요즘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비선실세 최순실씨의 국정농단이 사실로 드러나면서 영화계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시대를 풍자한 블랙코미디 영화들이 ‘다큐멘터리’로 여겨지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됐다. 현실과 영화가 어느 때보다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 밖에 없으니 장면 하나하나에도 웃지 못할 사연이 담기게 된다.
2004년 박근혜 의원 영상 넣은 이유
최근 한 동영상이 온라인을 떠들썩하게 했다. 2004년 국회에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이 가결되자 당시 박근혜 의원이 웃고 있는 모습이 담긴 영상이다. 여러 인터넷 매체와 네티즌은 ‘12년만의 엇갈린 운명’이라고 해석했다. 이 문제의 장면은 18일 개봉하는 영화 ‘더 킹’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지난해 7월에 촬영을 마친 영화가 시대를 예견한 셈이다.
‘더 킹’은 국내 검사들을 부정부패의 근원으로 적시하고 있다. 권력을 좇는 검사 박태수(조인성)을 통해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현대사를 짚으며 권력의 변동을 꿰뚫는다. 전두환 정권시절을 배경으로 이야기의 서두를 제시하는 이 영화는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등 역대 대통령들의 당선되는 순간을 클로즈업해낸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 가결에 대한 뉴스 영상이 눈길을 끈다. 이 영상에 박근혜 당시 의원의 웃는 모습이 스치듯 들어있는데 시국을 감안하면 간단히 넘길 수 없다.
이 장면은 3년 전 완성한 시나리오에 이미 담겨있었다. 영화를 완성한 지 얼마 안 돼 국정농단 사태가 터졌다. ‘더 킹’의 한재림 감독은 “박근혜 대통령과 관련된 이 장면을 빼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이 많았다”며 “시국 때문에 뺄까도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는 “그렇다고 여러 가지 영화적 효과들을 시국 때문에 버릴 필요는 없지 않나”라는 생각에 편집하지 않았다.
너무 현실 같은 ‘청와대 저격’은 삭제
영화 ‘판도라’는 시국에 울고 운 장면들이 많다. 어쩔 수 없이 등장인물의 직함을 바꾸거나 장면 자체를 편집하는 강수를 둬야 했다. 3년 전 시나리오를 완성해 영화를 연출한 박정우 감독은 “귀신이야” “자리 깔아야겠다”는 말을 주변에서 들었다. 역대 최대 규모의 강진으로 원자력발전소 폭발 사고를 일어나면서 벌어지는 재앙을 다룬 ‘판도라’는 지난해 9월 경주 지역에 발생한 5.8 규모의 지진을 예견한 꼴이 됐다. 게다가 무능한 대통령 등 청와대의 무기력함 모습을 꼬집는 내용을 담고 있어 개봉 이후 더 화제가 됐다.
엄혹한 현실을 감안해 국무총리(이경영)와 대통령(김명민)의 대사는 많이 잘려나갔다. 예고편에는 있지만 영화에는 삭제할 수밖에 없는 장면이 잇따랐다. 지진이 난 뒤 “대통령은 지금 판단 능력을 상실하셨습니다”, “대통령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라고 몰아세우는 총리의 대사, 관저에서 생각에 잠긴 무능한 대통령의 모습은 개봉을 앞두고 영화에서 사라졌다. 국정농단으로 대통령 직무가 사실상 박탈된 박 대통령의 상황과 너무 닮아서다. “오히려 영화의 의미가 퇴색될 것 같아” 뺐다는 게 박 감독의 설명이다.
대통령을 미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도 들어냈다. 대통령이 발전소 복구 현장에 나와 “죄송합니다”라고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원래 있었는데 관객들에게 반감을 살 수 있어서다. 원전 하청업체 노동자 재혁(김남길)이 “쇼하고 있네! 이게 나라입니까!”라고 말하는 대목도 가위질 당했다.
지난해 여름 700만 관객을 모은 흥행작 ‘터널’은 몸을 좀 사린 경우다. 간접적으로 박 대통령을 겨냥했다. 무너진 터널 앞에서 구조작업계획을 듣던 국민안전처 장관(김해숙)이 “전문가들이 잘 협의해 구조하도록 하라”는 ‘유체이탈’ 화법을 쓰며 대통령을 우회적으로 공격한다. 이 장면을 위해 ‘터널’의 김성훈 감독은 용기 아닌 용기를 내야 했다. 원래 시나리오에는 여자 장관이라는 설정이 없었다. 김 감독은 “영화가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 하고, 여성 장관이 현 대통령을 희화화했다는 반응에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현실을 비판한 영화이기 때문에 피할 생각은 없었다”고 소신을 밝혔다. 여름과 겨울, 불과 두 계절 사이에 시국이 급변한 것을 ‘터널’은 의도치 않게 보여준다.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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