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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나를 찾아온 ‘야래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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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나를 찾아온 ‘야래향’

입력
2017.01.18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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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 일본 극단 ‘사계’에서 활동하던 때 이야기다. 하마마츠쵸 자유극장에서 ‘빨강머리 앤’을 공연하던 중이었다. 공연 중에 내 노래가 끝나자 가장 앞자리에 앉아있던 할머니 한 분이 벌떡 일어서서 박수를 치셨다. 선글라스를 낀 멋쟁이 할머니였다. 선글라스 끼고 공연을 보는 것도 특이했지만, 공연 중에 기립박수를 치는 건 드문 일이라 속으로 많이 놀랐다. 일본에서 이런 일을 경험할 줄은 생각도 못했던 거였다.

퇴장한 후에 함께 공연하는 선배 배우에게 방금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선배는 깜짝 놀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정말 그렇게 하셨어? 굉장하다! 그분이 바로 그 유명한 이향란 선생님이잖아.”

이향란. 일본 이름은 야마구치 요시코였다. 중국에서 더욱 이름을 남긴 가수이자 배우다.

혈통은 일본인이었지만, 중국에서 나고 자란 까닭에 중국문화에 익숙했다. 무엇보다도 의부가 지어준 이향란이라는 중국 이름으로 연예계 활동을 하게 되면서 중국은 물론이고 아시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가수이자 배우 중의 한 명이 되었다.

일본의 패전 후 그는 간첩으로 체포돼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구사일생으로 일본으로 건너왔다.

그의 극적인 삶은 사계에서 만든 창작뮤지컬 ‘이향란’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그날 그분을 만난 기억은 내게 너무 특별한 추억이 되었다.

- 중국에서 운명처럼 찾아온 ‘야래향’

시간이 흐르고 한국으로 귀국 후 나는 중국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창작 뮤지컬을 만드는데 배우들의 노래를 지도할 한국 선생님이 필요하다고 해서 간 길이었다. 기획사 대표가 오디션 심사를 하면서 마음에 쏙 드는 배우가 없다고 토로하자 “홍본영 선생님 노래를 들어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대표와 다른 심사위원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 박수 한번으로 나는 덜컥 배우로도 캐스팅 되어버렸다. 그 배역의 대표곡은 ‘야래향’이었다. 바로 수년 전 내 노래를 듣고 기립박수를 치셨던 이향란 선생님의 대표곡이었다.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때마다 ‘야래향’이 내 안으로 스미어 오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할수록 기이한 일이었다. 일본에서 이향란 선생님을 만난 것도, 내가 중국에서 처음으로 부른 노래가 ‘야래향’인 것도 우연이 아닌 것만 같았다. 게다가 한국방송에서 나에게 붙인 닉네임은 ‘등려군을 잇는 중국 뮤지컬 여왕’이었다. 등려군이 누군가. 1930년대에 처음 히트한 ‘야래향’을 리메이크해서 국민가요에 등극시킨 불세출의 스타였다. 이향란 선생님과 등려군, 그리고 내가 ‘야래향’이라는 노래 안에서 도원결의를 맺은 형국이었다. 이향란은 박수로 나를 초대했고, 등려군은 직접적인 접촉은 없었지만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 이향란 선생님이 나의 ‘야래향’을 들었다면

‘야래향’은 일본인이 처음 불러 중국에서 흥행했고, 한국에서도 널리 불린 아시아의 노래이다. 노래가 중국과 일본의 가수에 이어 마지막으로 한국 가수를 나를 ‘간택’한 것이 아닐까. 노래가 나를 찾아온 느낌이 드는 것이다.

무대에 서면 중국은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으레 홍본영의 ‘야래향’을 신청한다. 혹자는 등려군의 ‘야래향’과 나의 ‘야래향’을 비교하면서 ‘등려군은 평지를 걷듯 나긋나긋하게 부르는데, 홍본영은 고개 고개를 넘어가는 한국의 길처럼 노래가 고갯길과 산을 넘어가는 느낌이 든다. 홍본영의 ‘야래향’에는 아리랑 고개가 있다’는 평가를 하신 적이 있다. 내 노래에 한국적인 DNA가 있다는 뜻으로 들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나는 한국인 가수니까.

이향란 선생님은 2년 전에 돌아가셨다. 내가 중국에서 ‘야래향’ 부르는 걸 보셨다면, 그리고 내가 8년 전 일본극단에서 기립박수를 보냈던 그 배우라는 걸 아셨다면 얼마나 놀라고 좋아하셨을까, 생각해본다.

홍본영 뮤지컬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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