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ㆍ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향해 한 발짝 더 다가선 거죠. 내 나이 칠십을 넘어서….”
1980년 5월 광주, 그날의 참혹함을 지켜봤던 서른네 살의 청년은 어느덧 칠순이 넘었다. 정수만 5ㆍ18기념재단 비상임 연구원. 그는 5ㆍ18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두 귀로 봤던’ 목격자다. 그는 17일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아직도 그 때 헬기 총격 소리가 귀에 생생하다”고 했다. “5ㆍ18은 증거로 말한다”는 그의 삶은 5ㆍ18 진실 찾기 역사와 같다. 80년 당시 계엄군의 총탄에 동생을 잃은 그는 82년부터 32년간 5ㆍ18민주유공자 유족회장으로 활동하며 5ㆍ18 진실 규명에 반평생을 보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5ㆍ18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은 풀지 못한 숙제였다. 목격자들의 증언은 있었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가 없었던 터였다. 정씨의 답답했던 속을 뻥 뚫어준 건 정부였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지난 12일 “금남로 1가에 위치한 전일빌딩 10층 내부에서 발견된 탄흔(142개)들은 헬기와 같은 비행체에서 쏜 총탄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감정보고서(본보 13일자 1면)를 내놓은 것이다.
“세상에 무고한 시민들에게, 그것도 헬기에서 총을 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잠시 침묵이 흘렀다. 37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날을 기억하는 건 여전히 고통이었다. 그의 입술은 파르르 떨렸고, 검은색 뿔테 안경 너머로 보이는 미간엔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가 헬기 사격을 목격한 건 계엄군의 집단발포가 있었던 80년 5월 21일이었다. 그날 오후 1시30분부터 2시 사이 옛 전남도청 뒤 남동성당 주변 골목에 있던 그는 갑자기 머리 위에서 ‘탕탕탕’ 하는 총성을 들었다. 깜짝 놀라 하늘을 본 그의 두 눈엔 헬기 1개가 들어왔다. 본능적으로 인근 향나무 밑으로 몸을 숨긴 그는 얼마 뒤 헬기가 사라지자 집으로 향했다. 그는 당시 헬기의 고도가 육안으로도 탑승자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높이였다고 했다. 그의 증언은 1995년 전두환 전 대통령 등의 내란목적살인 혐의를 수사하던 검찰이 확보했던 헬기 사격 목격자들(11명)의 진술과도 거의 일치한다. 당시 목격자들은 “헬기에서 ‘타다닥’하는 사격이 있었고, 사격 섬광도 봤다”(김모씨), “전남도청 앞 4층 건물 옥상에서 시민이 헬기에서 쏜 총에 맞아 숨졌다”(정모씨)고 했다.
그러나 당시 검찰은 ‘헬기 공중사격에 대한 군 기록을 발견할 수 없다’는 점 등을 들어 헬기 사격은 없었던 것으로 결론 내렸다. 이 대목을 묻는 질문에 정씨의 목소리가 커졌다. “당시 광주소요사태분석(교훈집) 항공편 등 군 자료를 보면 계엄군의 헬기에 장착된 기관포 실탄이 1,500발 지급됐습니다. 그런데 군이 헬기 사격을 안 했다면 이 실탄들을 반납했어야 하는데, 군은 이를 입증할 기록을 내놓지 못하고 있어요. 이게 뭘 말하는 걸까요?”
정씨는 “당시 군이 광주소요사태분석 항공편을 통해 문제점으로 지적한 ‘높은 탄약소모율’도 사실상 헬기 사격을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했다. 정씨는 군 당국의 거짓말을 밝혀내기 위해서라도 총상을 입은 전일빌딩에서 총탄을 찾아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과수가 빌딩 10층 천장 텍스에서 발견된 탄흔을 근거로 천장 슬래브와 텍스 사이 공간에 총탄이 남아 있을 가능성을 언급한 터였다. 광주시도 이를 근거로 국과수에 총탄 발굴을 의뢰키로 했다.
국과수는 5ㆍ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보관 중인 옛 광주은행 본점 건물의 총탄 흔적이 남은 유리창 3장에 대한 정밀 분석에도 나서 진실 규명에 대한 기대를 부풀게 했다. 이 유리창 은 광주은행이 1997년 광주시에 기증한 것으로, 2장은 기록관 1층에 전시 중이며, 나머지 1장은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정씨는 “전일빌딩의 탄흔들이 5ㆍ18에 대한 왜곡과 폄훼를 멈추게 했으면 좋겠다”며 “특히 군 당국의 자위권 발동 주장이 거짓으로 드러난 만큼 이제부터는 아직 미완으로 남아 있는 발포명령자를 밝혀내는 게 나를 비롯해 살아남은 자들의 할 일”이라고 말했다.
광주=글ㆍ사진 안경호 기자 k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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