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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없이 5남매 키운 54년 터전 사라져…” 한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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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없이 5남매 키운 54년 터전 사라져…” 한숨만

입력
2017.01.1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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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에 넋 잃은 여수수산시장

“연등천 범람 피해는 버텼지만…

큰 딸 등록금ㆍ네 식구 생계 막막”

임시 판매장 3, 4곳 물색 중

지붕 붕괴 등 2차 사고 우려

1층 횟집서 전기 단선 정황 발견

지난 15일 오전 2시21분쯤 전남 여수시 교동 여객선터미널 맞은편 수산시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125개 점포 가운데 116개가 불에 탔다.
지난 15일 오전 2시21분쯤 전남 여수시 교동 여객선터미널 맞은편 수산시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125개 점포 가운데 116개가 불에 탔다.

“수십 년 이어온 생계터전이 한 순간에 사라지다니…”

21세 때부터 50년 넘게 매일 새벽마다 시장에서 생선을 손질하던 홍복득(75) 할머니는 하루아침에 시장을 잃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여수수산시장이 처음 터를 잡을 때부터 이곳에서 장사를 해왔던 홍 할머니는 54년 간 남편도 없이 5남매를 키웠고, 손자들이 결혼하는 모습도 지켜봤다.

홍 할머니는 화재가 발생한 15일 새벽에도 평소처럼 시장에 나왔다. 소방차들이 시장 앞 도로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렇게 시커먼 연기 속에 잿더미처럼 사라지는 가게를 속절없이 바라봤다.

홍 할머니는 화마가 할퀴고 간 흔적 속에서 혹시라도 가게에 보관해둔 통장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다음날 시장을 찾았다. 그러나 폴리스라인에 막혀 접근이 금지된 시장 내부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웃 상인은 “시장에서 평생을 사신 분이라 죽기 전에는 시장을 못 떠나실 분”이라며 “명절 대목이나 끝나고 불이 나지 그랬나…”고 안타까워했다.

16일 오전 여수수산시장 내부는 상인들의 50년 삶의 터전을 앗아간 전날 화재로 메케한 냄새와 타고남은 검은 그을림으로 가득했다. 좌판 위에는 반쯤 불에 탄 생선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시장 천장은 무너지고 기둥은 휘어져 피해는 예상보다 심각해 보였다.

이날도 밤잠을 설치고 이른 새벽부터 다시 화재 현장을 찾은 200여명의 상인들은 모두 설을 앞두고 막막해진 생계와 자녀들 학비를 걱정했다. 이곳에서 15년 동안 서대, 명태, 미역 등 건어물 장사를 한 김모(59)씨는 “생선 팔아 하루하루 살아가는데 당장 네 식구가 뭘 먹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며 “제일 큰 걱정은 큰 딸 대학 등록금이다. 대출을 받아야 할지 휴학을 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하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32년째 활어를 취급한 박모(64)씨는 “그 동안 장사하면서 시장 옆 연등천이 범람해 피해를 입었어도 이겨내고 살아왔는데 이번 화재로 산소가 끊긴 수족관에 죽은 물고기를 보면 기가 막혀 말문이 막힌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이번 화재로 명절용 제사용품 등을 팔려고 준비했던 상인들의 택배 상품을 비롯해 시설물 등 수십억 원의 피해가 예상되고 있다. 현재 여수수산시장에는 설을 앞두고 물품을 가득 채운 냉동창고가 25개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상인들은 경찰과 보험사의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냉동창고에 보관 중인 상품이 상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상인들은 “하루라도 빨리 영업을 재개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지방자치단체와 정치권에 호소했다.

여수시는 영업 정상화를 위해 임시 판매장을 개설하기로 했다. 화재 현장 인근의 수산물특화시장 주차장과 이순신광장 등 3, 4곳이 후보지에 올랐다. 또 한국전력과 협의해 17일까지 전기선을 새로 깔아 전력 공급을 재개할 계획이다.

다만 현장 복구에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경찰, 소방당국의 합동 감식을 비롯해 보험사 조사, 화재 현장의 잔여물 처리 등이 이날 시작됐다. 건물이 열을 받은 상태로, 지붕 붕괴 등 2차 사고 우려마저 있어 정밀 안전진단도 해야 할 상황이다.

여수경찰서는 화재 직후 1차 현장 감식을 한 결과, 불이 시작된 점포와 주변에 설치된 전기 배선이 끊어진 흔적을 발견하고, 화재 원인을 전기 배선 문제로 보고 있다. 폐쇄회로(CC)TV 영상에 시장 1층 가운데 쪽 횟집 내부에서 불꽃이 튀면서 불이 난 모습이 찍힌 점, 전기 단선 흔적 등이 근거로 제시됐다.

국민안전처는 이날 행정자치부와 국세청, 중소기업청 등 12개 기관이 참여하는 관계기관 회의를 열고, 여수수산시장에 재난특별교부세 10억원을 긴급 지원하기로 했다. 안전처는 “설 명절을 앞두고 화재 피해를 입은 수산시장이 하루속히 정상화할 수 있도록 잔해물 철거비와 폐기물 처리비 등 긴급복구 소요 비용을 지원했다”고 밝혔다.

여수=하태민 기자 ham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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