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도]옛날 같으면 다 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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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도]옛날 같으면 다 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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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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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씨가 16일 오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5차 변론기일에 증인으로 출석하고 있다. 서재훈 기자

죽겠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죽겠다’란 단어를 가장 많이 쓴다고 하는데 맞는 말 같다. 요새 정말 죽을 것 같다. 이러다가 정말 과로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봤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대한민국을 뒤덮은 작년 하반기부터 이런 생각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보고하고 보고 받고, 취재하고 기사 쓰고, 브리핑 듣고 뉴스 보고 하다 보면 하루가 훌쩍 간다. 마음 편히 사람 만날 시간이 없고, 밥 먹는 시간조차 아까울 때가 있다. 아침부터 노트북 자판기를 두드리기 시작해 꼬박 업무를 마치면 보통 밤 10시다. 건강을 해치는 지름길이지만 머리가 너무 아파서 술을 마셔야 잠이 온다. 지난 1년간 주5일 근무를 해본 적이 없다. 더구나 다음날 발제거리를 찾으려면 새벽에도 취재원을 만나야 한다. 유일하게 발 뻗고 누울 수 있는 토요일에도 주중에 못 만났던 취재원들을 만나느라 평일보다 더 바쁘다.

그런데도 성과가 없다고 툭툭 내던지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치밀 때가 있다. 후배기자들도, 타사기자들도, 대한민국 법조 출입기자들은 이런 생각을 한두 번은 해봤을 터. 이런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가끔 어깨를 두드리며 걱정해주는 선배도 있다. “그렇게 일한다고 알아주는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건강 잘 챙기고 가정에 충실해라. 아프면 조직이 챙겨줄 것 같나. 조직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 매정하게 버린다.”

‘결국 세상이 이렇게 무섭구나’ 생각하면 문득 옛날이 그립다. 일에 너무 치이다 보면 옛날이 그립고, 삶이 고통스런 순간엔 더욱 그립다. 선별적 기억 탓이겠지만 그 때는 지금처럼 팍팍하진 않았던 것 같다. 사건사고도 많았지만, 여유가 있었고 양보가 있었고 추억이 있었다. 여럿이 옛날 이야기를 공유하다 보면 잠깐 동안이지만 스트레스가 더 빨리 해소된다. 옛날은 나에게 그리움의 대상이자 삶의 원동력이다.

그런데 이토록 신성한 옛날 이야기조차 비교의 개념을 들이대며 재단하려는 고약한 선배들이 있다. 이 사람들에게 옛날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재활용된다. “요새 기자들은 옛날하고 비교하면 일을 너무 안 해. 기자정신도 없고.” 잘 알고 지내는 언론계 선배가 술 마시면 후배들을 타박하며 자주 하는 말이다. 멋진 취재 무용담과 특종 기사를 썼던 일화는 30번은 더 들어도 지겹지 않다. 하지만 그 선배는 촌지 받고 공무원 인사 개입하고 공짜골프 쳤던 사실은 한 번도 이야기 한 적이 없다. 자랑과 훈계보다는 잘못된 관행과 진지한 성찰, 정작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말이다.

후배들에게 일을 시킬 때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옛날에 누린 불합리한 특혜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고, ‘요새 애들은 너무 일을 안 한다’며 고압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선배들이 있다.

내가 아는 검사들도 그렇다. 기회 될 때마다 자신의 화려한 과거와 수사성과, 조사 뒷이야기를 침을 튀기며 말한다. 그들이 입을 열면 금새 빠져든다. 너무나 생경한 상황인데 너무나 리얼하게 묘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언어에는 중요한 게 빠져 있다. 무용담까지는 좋은데 향수에 젖었을 뿐 과거의 불합리한 행태를 진솔하게 되돌아보거나 반성하는 모습은 들을 수 없었다. 옛날 이야기를 하는 검사 중에서 스폰서에게 용돈 받고 변호사랑 룸살롱 갔다고 자성하는 검사를 본 적이 없다. 경찰도 그렇다. 옛날 이야기를 자랑 삼아 하는 사람 중에서 범인 잡고 제도 바꿨다고 큰소리치는 경찰은 봤어도, 촌지 받고 피의자 때렸다고 부끄러워하는 경찰은 손에 꼽을 정도다.

옛날엔 옛날이 그립다는 사람과 술잔을 기울였지만 지금은 가끔 의심도 한다. 의심은 해야 진실이 보이기 때문이다. 기억이 1970년대에 머물러 있는 박근혜 대통령도 옛날을 그리워하지 않을까.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런 말을 내뱉으면서 말이다. “옛날 같으면 너희는 다 죽었어.”

강철원 사회부 기자 str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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