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이후 민주주의 형식만 갖춰
내용은 못 채워 국정농락 초래
권력지향 검찰ㆍ사망진단 논란 등
동생 고문치사 은폐한 기만 여전”
“누구나 간고등어를 나눠먹을 수 있는 세상.”
30년째 22세인 청년이 꿈꾼 세상이다. 그 긴 세월 그의 소박한 바람은 이뤄졌는지, 비선실세의 국정농락으로 망가진 작금의 비극을 뭐라고 할지, 벌써 12주째 주말마다 촛불을 드는 시민들을 어떻게 바라볼지 물을 방법이 없다. 자신의 목숨을 버려 이 땅의 민주주의로 피어난 열사의 피붙이를 만나 실마리를 풀어가는 수밖에. 14일은 공권력의 모진 고문으로 숨진 고 박종철 열사의 30주기다. 그의 죽음은 1987년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박종부(59)씨는 동생의 기일을 하루 앞둔 13일 서울 용산구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사무실에 있었다. 박씨는 “50줄에 들어섰을 종철이도 최근 사태를 봤으면 열 일 제치고 광장으로 나왔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노동자들의 삶은 종철이가 같이 싸웠던 때보다 더 열악해지고 빈부 격차도 더 심해졌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에 “87년 민주항쟁 이후 민주주의 형식만 만들어졌을 뿐, 그 내용을 채우지 못해 비선실세의 국정농락 같은 입에 올리기도 부끄러운 상황이 벌어진 것”이라는 진단이 더해졌다.
살아남은 형은 슬픔에 잠겼다. 이 땅의 민주주의가 가야 할 길은 여전히 멀고 더디다는 것이다. “위선적인 정치인과 권력지향적 검찰, 폭력적인 경찰은 30년 전과 별반 달라진 게 없습니다. 사망진단서를 바꾸는 등 동생의 고문치사를 은폐했던 권력의 기만적인 행위는 지금도 여전합니다.”
동생 사건의 축소 및 은폐 의혹을 받던 박상옥 당시 검사는 2015년 5월 대법관으로 영전했고, 같은 해 11월 농민 백남기씨는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 쓰러졌다. 올해 백씨는 끝내 숨졌지만 책임자 처벌은커녕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다. 사망진단서를 둘러싼 논란만 여전하다. 박씨는 “권력자들의 위선과 횡포에 남들보다 더 심한 좌절감에 휩싸였다”고 말했다.
그래도 동생의 꿈을 놓을 수 없다. 그는 “누구나 간고등어를 나눠먹을 수 있는 세상이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라며 “사회적 부가 한곳으로 편중되지 않게 복지국가를 만들어야 한다. 최순실 때문에 헛되게 쓰인 예산이 복지정책에 쓰이고 영세기업 활성화를 위해 쓰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고인의 아버지 박정기(89)씨는 막내아들을 기리기 위해 지팡이를 짚고 경남 양산시 성전암에 올랐다. 구순을 바라보지만 먼저 떠난 아들을 대신해 우리 사회의 적폐를 지적하는 일에 열정을 쏟고 있다. 그는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촛불집회는 그 동안 쌓여 온 문제들을 해결하고 과거를 청산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라며 “권력자들은 시민들의 목소리와 영향력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와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형은 고인을 떠나 보낸 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회 등에서 사회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690m 떨어진 옛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 2005년 경찰청 인권센터로 이름을 바꿔 일반인들을 맞고 있다. 함박눈이 내린 이날도 시민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5층 취조실은 녹색 출입구 14개가 복도를 따라 마치 미로처럼 엇갈려 있었다. 고인이 숨을 거둔 3평 남짓한 509호에는 물고문이 자행됐던 욕조와 작은 세면대, 딱딱한 침대가 원형 그대로 남아 있었다. 소리가 새 나가지 못하도록 구멍을 뚫은 흡음판으로 둘러싼 벽은 음산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우리 현대사 비극의 한 공간을 찾은 시민들은 최근 시국상황과 맞물려 고인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되새기고 있었다. 홀로 이곳을 찾았다는 대학생 고현민(25)씨는 “우리나라의 민주화는 87년부터 지금까지 현재진행형”이라며 “박 열사 같은 분이 안 계셨다면 그나마 지금처럼 촛불을 들고 의견을 표현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정반석 기자 banse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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