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 후보가 英 정보업체에 의뢰
민주도 공화 후보 확정 후 돈 지원
미국 정치권을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러시아 정부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의 약점을 잡았다’는 내용의 기밀문서는 다름 아닌 공화당 내부 정적의 의뢰로 작성된 것으로 드러났다. 워싱턴 정가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 암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출발점부터 이후 첩보영화를 연상시키는 공개 과정까지 보고서 발표의 뒷이야기가 주목을 받고 있다.
11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 등은 미 정보당국이 트럼프 당선인에게 최근 브리핑한 러시아의 정보 활동 관련 보고서가 지난해 공화당 경선에 나선 트럼프 경쟁 후보의 요청으로 최초 작성됐다고 보도했다. 익명의 공화당 정치인은 트럼프 당선인을 공격하기 위해 워싱턴 소재 사설 정보업체에 일종의 뒷조사를 요청, 이 기업은 다시 외부의 러시아 전문 정보업체에 작업을 맡겼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정보수집을 최종 진행한 곳은 영국 비밀정보국(MI6) 요원 출신 크리스토퍼 스틸(52)이 운영하는 런던의 사설 정보업체 ‘오비스 비즈니스 인텔리전스’다.
스틸이 정보를 수집한 직후부터 험난한 여정이 시작됐다. 지난해 미국 공화당 경선은 예정 시기인 7월 이전 후보들이 줄줄이 사퇴하면서 트럼프의 독무대가 됐다. 최초 의뢰인이었던 공화당 후보가 물러나자 이번엔 민주당 측이 ‘트럼프 뒷조사’의 새로운 자금지원줄이 됐다. 스틸은 이에 힘입어 다수의 러시아 정부 관계자와 올리가르히(러시아 신흥 재벌) 등을 통해 러시아가 섹스 비디오 등 트럼프를 협박할 만한 사생활 정보를 확보했다는 증거를 지난해 7월 손에 넣었다.
보고서는 이후 은폐 의혹과 비밀 접촉 등 한편의 영화 같은 과정을 거쳐 세상에 공개됐다. 스틸 측은 같은 해 8월 35쪽 분량의 보고서를 미 연방수사국(FBI)에 넘겼다. FBI가 추가 조사를 진행할 것이라는 계산이었으나 두달 이상 FBI는 아무런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스틸이 FBI에 정보 은폐 의심을 품게 된 가운데, FBI가 전직 연방검사이자 트럼프의 최측근인 루디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과 긴밀히 연계돼 있다는 정황은 의혹을 더했다. 이에 스틸은 10월 말 비영리 탐사보도 언론 마더존스를 통해 처음으로 자료의 존재를 밝힌다.
보도 이후 스틸의 보고서는 여러 방향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2008년 대선 후보이자 지난해 트럼프의 ‘음담패설 녹음파일 파문’을 맹비난했던 공화당 존 매케인(애리조나) 상원 군사위원장의 역할이 지대했다. 매케인은 지인을 통해 보고서를 인지, 유럽 모 공항에서 ‘파이낸셜타임스를 들고 있는 남성을 찾으라’는 미션을 수행하는 등 비밀 접촉 끝에 자료를 입수했다. 매케인은 지난달 제임스 코미 FBI 국장을 독대해 자료를 전했다고 11일 성명을 통해 발표했다.
보고서는 약 6개월 간의 기다림 끝에 6일 FBI와 국가정보국(DNI) 등 정보 수장들에 의해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트럼프 당선인에게 공식 보고됐다. 증거 불충분 등으로 의혹 제기에 소극적이었던 FBI가 입장을 바꾼 데는 자료 공개가 임박했다는 압박이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가디언은 “FBI가 돌연 행동에 나선 것은 자신들이 은폐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 조치였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정원기자 garden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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