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자정 김성태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국정조사특위 위원장이 7차 청문회의 산회를 선포하며 의사봉을 두드렸다. 사실상 마지막 청문회를 마무리하는 ‘의사봉 3타’ 의식에서 받침으로 쓰인 붉은색 목판엔 찍히고 패인 자국이 어지럽게 나 있었다. 50일 남짓한 특위 활동 기간 무수히 반복된 개회와 정회, 산회, 가결 선포의 흔적들이다. 청문회 내내 ‘모른다’ ‘아니다’ 로 일관하며 뻔뻔함의 극치를 보인 증인들의 태도 또한 의사봉 받침 위에 선명한 흠집을 보탰다.
촛불을 들고 거리를 메운 민심은 의사봉의 흔적이 늘어날수록 진상이 하나 둘 밝혀지길 기대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핵심 증인들은 나타나지 않았고 청문회는 위증 의혹과 알맹이 없는 호통으로 얼룩졌다. 결국 증인 38명에 대한 고발을 의결하며 위원장이 내리친 의사봉은 받침뿐 아니라 국정농단으로 상처받은 국민 가슴에 또 다시 깊은 상흔을 남겼다. 오랜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어지러운 의사봉의 흔적을 바라보며 후대가 기억해 낼 오늘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세월호 실종자 수색이 한창이던 때 미용시술을 받은 박근혜 대통령은 얼굴에 고스란히 남은 시술 흔적이 뒤늦게 발견되면서 결국 국민적 공분을 샀다. 실체가 사라져도 흔적은 남고, 그 흔적을 통해 실체가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 셈이다. 그러나 흔적마저 사라지면 기억은 희미해지고 만다. 세월호 참사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 정부는 민생을 앞세워 세월호 흔적 지우기에 나섰고 가족들은 차가운 바다에 가라앉은 진실의 흔적을 찾아 헤매야 했다. 그로부터 1,000일이 지난 지금 이들은 희미해진 아이의 기억을 힘겹게 부여잡고서 참사의 실체가 낱낱이 드러나는 희망을 다시 다지고 있다.
일상은 수많은 흔적을 간직한 채 흘러간다. 또렷하거나 혹은 흐릿한 채로 흔적은 발길에 채인다. 세상 모든 것은 언젠가는 닳아 없어지기 마련이며 실체 또는 상황의 존재를 기억하게 해 줄 흔적 역시 유효기간은 정해져 있다. 지하철역 출입구 주변 바닥에 부착된 금연 스티커가 그렇다. 출입구 10m 이내를 금연구역으로 지정하며 과태료를 부과하기 시작한 게 불과 4개월 전, 오가는 발길에 밟히고 닳아 없어진 경고문구는 이미 알아 볼 수 없다. 희미해진 흔적과 함께 배려의 기억도 사라져 간다.
서울역고가 공사로 우회 차량이 몰린 서울 중구 염천교 일대 도로 위엔 접촉사고를 표시한 흰색 페인트가 지난해 내내 넘쳤다. 당사자에겐 짜증나는 기억이면서 타인에겐 조심 운전을 각성하는 교훈의 흔적들이다. 화물차 기사는 짐을 올리고 내리며 먼지가 수북한 적재함 문에 생계의 흔적을 남겼고, 구식 공중전화기엔 세월의 흔적이 무수히 많은 잔 흠집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 계절 화려했던 기억마저 말라붙은 담쟁이 넝쿨은 봄이 오면 다시 살아나는 오묘한 흔적이다. 잊혀짐의 과정 한 가운데서 새로운 실체의 등장을 예고하는 희망의 흔적이다.
류효진기자 jsknight@hankookilbo.com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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