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자신은 그 사건(통일혁명당 사건)이 역사에서 어떻게 기록되기를 바랍니까?”(고 정운영 선생)
“사건의 역사는커녕 하물며 자기 이름 석 자도 자기가 바라는 대로 기록되지 않습니다. 특별히 바라는 바가 없습니다. 화가들이 어떤 모습을 그리든 상관없이 남산은 남산의 온당한 모습으로 남게 되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지나면 뼈만 남는 법입니다. 그리고 뼈가 더 정확합니다.” (고 신영복 선생)
지난해 1월 별세한 신영복 선생 1주기를 맞아 유고집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와 대담집 ‘손잡고 더불어’가 출간됐다. 유고집에는 고인의 기존 저서에 담기지 않았던 기고, 강연록 등이 담겼다. 특히 ‘가을’, ‘성의 개념’ 등 7편의 글은 1968년 구속되기 전, 청년 시절에 쓴 것으로 출판사가 유족으로부터 입수해 처음 공개했다.
3부로 구성된 유고집은 1부에 인생을 반추하는 글을, 2부에 철학적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사색들을, 3부에 사상의 정수를 확인할 수 있는 글들을 추려 담았다. 공개된 글들은 특유의 따뜻한 통찰과 곡진한 문장을 다듬어 가며, 막 담금질을 시작한 청년 신영복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비록 그것이 아무리 참담한 현실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사랑할 줄 아는 피를 가져야 한다. 더 높은 산이, 더 자비로운 신이, 더욱 더 애절한 소리가 여기 인간의 현실 속에 있다. (…)인간의 부근에서, 우리에게 부과되는 숱한 과업을 위하여 노력하는 자세, 그 자세로 휴식할 수 있는 피부를 경작하자.” (151쪽)
유고집은 시차가 무색할 만큼, 현재 한국사회를 적확하게 겨냥하는 2013년 기고로 마무리 된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참 멀고도 험하다. 더구나 함께 할 동반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동반자는 나 자신이 먼저 좋은 동반자가 될 때 비로소 나타나는 법이다. (…)정치란 무엇인가. 평화와 소통과 변화의 길이다. 광화문(光化門)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길이다.” (378쪽)
함께 나온 대담집은 20년의 수형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이듬해인 1989년부터 타계하기 직전인 2015년까지 나눈 담화 10편을 가려 뽑아 수록했다. 언론, 학술지 등에 한 차례 실린 것들이나 고 정운영 선생 등 묵직한 인터뷰어들과의 대담만 골라 추린데다 ‘글’에선 볼 수 없었던 유년기, 통혁당 사건 연루 시기 등에 대한 전기적 사실이나 솔직한 심경이 적잖이 담겨 한편의 회고록처럼 읽히기도 한다. 평생 암흑 속에서 깨달음의 언어를 길어 올린 그는 투병 중이던 2015년 진행한 대담에서 “끝으로 꼭 덧붙이고 싶은 말”을 묻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한 사람의 일생을 평가하는 데 여러 가지 기준이 있을 거에요. 그 사람이 세속적 가치에서 얼마나 뭘 이뤄 냈느냐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의 인생에 시대가 얼마나 들어와 있는가도 참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시대를 정직하게 호흡하고, 시대의 아픔을 함께하는 삶,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삶이 가치 있는 삶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334쪽)
출판사가 특별 제작한 1주기 추모 세트에는 ‘만남, 신영복 필사노트’가 담겼다. 감옥에서 쓴 엽서의 글 등을 읽고 써보도록 구성했다. 김창남 더불어숲 이사장은 유고집 서문에 “선생이 안 계신 자리에서 우리가 느끼는 적막함이 이 작은 선물로 채워질 수는 없겠지만 남기신 말과 글을 통해 삶과 뜻을 영원히 기억할 수 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썼다.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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