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당선작 | 주수철 ‘그린피아 305동 100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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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당선작 | 주수철 ‘그린피아 305동 1005호’

입력
2017.01.02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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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박민식 : 그린피아 매도 대리인

집주인 : 그린피아 305동 1005호 집주인

이철권 : 그린피아 매수인의 아버지

이동석 : 그린피아 매수인

중개사 : 그린피아 부동산 공인중개사

여직원 : 부동산 사무실 직원

세입자 : 그린피아 세입자

장소

그린피아 부동산 사무실

무대

무대 중앙에 테이블과 2개의 소파가 있고 왼쪽으로 사무용 책상이 있다. 책상 위에는 컴퓨터 모니터가 있다. 책상 뒤쪽 벽에는 공인중개사 자격증이 액자 속에 걸려 있고 그 아래로 생수통이 보이고 일회용 커피와 여러 티백들을 담은 종이 상자가 보인다. 오른쪽 끝에 출입문이 있다.

막이 오르면 부동산 사무실 여직원이 컴퓨터 작업을 하고 있다. 이 때, 휴대폰 소리가 울리면서 30대 초반의 한 남자가 들어온다. 남자, 전화를 받는다.

(소리만) 박민식씨 맞습니까?

박민식 누구요?

(소리만) 본인은 금감원 김팀장인데요, 박민식씨 계좌가 범죄 조직의 자금 세탁 계좌로 이용된다는 첩보가 있어 전화했습니다.

박민식 나는 서울지검 보이스피싱 박멸팀장인데, 전화건 댁이 보이스피싱 똘마니로 일한다는 첩볼 입수했다. 어쩔래?

(소리만) ······

박민식 (전화를 끊는다.) 속아주고 싶어도 속아줄 수가 없네.

여직원 어떻게 오셨어요?

박민식 (주위를 한바퀴 둘러보고 소파에 앉는다.) 그린피아 아파트 땜에 왔수다.

여직원 집 알아보시게요? 전세는 없고 월세 밖에 없는데···

박민식 내가 월세 살게 생기진 않았는데···

여직원 어머, 그런 게 아니라, 요새 전세 찾는 분이 너무 많아서요.

박민식 그린피아 아파트 305동 1005호 팔려고 왔수다.

여직원 아, 그렇잖아도 기다리고 있었어요. 매도인이시겠고?

박민식 대리인이죠.

여직원 그렇겠죠. 제가 주인 분과 통화했으니까. 매수인은 좀 늦는다고 하네요. 지방에서 오는 길이라···

박민식 빨리 끝내야 되는데···

여직원 거의 다 왔다고 했어요. 그런데 주인 분은 베트남에 계시다고요?

박민식 통화했다면서요?

여직원 저희야 신분 확인하고 매매 의사만 물어본 거죠.

박민식 들어 오겠다네요. 메이드 둘에 운전기사 있는데도 불편하다고. 하기야 궤짝에 돈 넣고 사는 사람들이니까 진짜 불편한 게 뭔지 알겠어요?

여직원 그런데 집은 싸게 내놨어요. 급매물도 아닌데··· 천만원이나 싸니까 바로 계약하자고 한 거예요.

박민식 내가 그렇게 내놓자고 했죠.

여직원 시세대로 받자고 하지 그러셨어요?

박민식 있는 놈들이 더하다고 더 받을 수 없냐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우리 같은 사람들은 월급 안 쓰고 10년 이상은 모아야 이런 집 사는데 무슨 욕심을 부리냐고 그랬죠.

여직원 꽤 친했던 모양이네요?

박민식 그 좀생이 같은 양반 밑에서 고생 좀 했죠. 그래도 나름 내가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니까 무슨 일 있으면 꼭 나를 찾더라고요. 귀찮아요. 돈 한 푼 안 줄 거면서.

이 때, 세입자 부인이 들어온다.

여직원 좀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세입자부인 (앉으며) 많이 있어야 하나요?

여직원 아직 매수자가 안 와서요. (박민식에게) 여기, 1005호 세입자에요.

박민식 세입자도 있어야 하나요?

여직원 계약하면 세입자 나가야 돼서 오늘 받은 거에서 계약금은 돌려줘야 해요. 그래야 이 집도 이사할 데 알아보니까요.

박민식 그런 얘긴 안 했잖아요?

여직원 굳이 얘기 안 해도 통상적으로 그렇게 하니까 안 했을 뿐이에요.

박민식 난 대리인이에요. 내 맘대로 할 수 없다고요.

여직원 지금이라도 말씀하시면···

박민식 그렇게 중요한 얘길 계약하는 당일 날 하라고요?

여직원 부담 가지실 게 없는 게요, 세입자한테 주는 돈은 이따 매수자한테 받은 돈에서 나가면 되거든요.

박민식 지금 돈 때문에 이러는 거요? 그렇게 중요한 얘길 지금 하니까 그러는 거 아니오.

여직원 솔직히 말씀드려서 이 세입자 부분은 중개하는 입장에서는 그냥 서비스 차원에서 해드리는 거예요. 집주인과 세입자 쌍방간의 문제거든요.

박민식 법적으로는 어떻게 돼 있소? 우리가 만기도 안됐는데 계약금을 돌려줄 의무가 있냔 말이오?

여직원 아마 그런 규정은 없는 걸로 알고 있어요. 통상 서로간의 편의를 위해 그렇게 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박민식 그럼, 우린 만기 때 다 주는 걸로 합시다. 좀스럽게 계약금 먼저 주고 나중에 잔금 주고, 이런 거 하지 맙시다.

여직원 그러면 세입자가 좀 곤란해 질 것 같은데요. (세입자 부인한테) 그렇죠?

세입자부인 우리도 이사를 해야 해서···

박민식 편의를 봐주고는 싶지만 어떡하겠소. 법적으로는 우리한테 아무 의무가 없다고 하잖소.

여직원 그러면 새댁, 일단 돌아가 있어요. 여기도 일단은 주인하고 상의해야할 것 같으니까.

세입자부인 (일어서서) 알겠어요. 이런 건 남편이 알아서 했으니까 얘기해 놓을게요.

세입자부인이 퇴장함과 동시에 매수인 이동석과 그의 아버지 이철권이 등장한다.

여직원 혹시 그린피아 아파트 건으로 오셨나요?

이철권 좀 늦었지라. 겁나 멀긴 머네.

이동석 저 혼자 한다니까, 굳이 오신다고 그러세요.

이철권 내가 와야 쓴당께. 너는 이런 거 처음이잖냐?

여직원 이 쪽으로 앉으세요. (박민식 맞은편 소파에 두 사람이 앉는다.) 여기는 1005호 매도인이시고요.

이철권 아따, 젊은 양반이 부자시네. 몇 억씩 가는 집도 있고.

박민식 매수인이 더 부자시죠. 듣기로는 신혼집이라면서요.

이철권 누가 들으면 참말로 그런 줄 알겄소. 지 돈은 눈곱만큼만 있지라. 다 은행 돈 아니겄소.

박민식 하긴, 요새 세상에 자기 돈 갖고 집 사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여직원 그래도 신혼 때 자기 집으로 시작하긴 쉽지 않죠.

이철권 다 남 좋은 일 시키는 거 아니겄소. 뭔 놈의 집값이 몇 억씩 하는지··· 살 떨려서··· 빚내서 하는 짓이라 더 그러는갑다.

이동석 그만하세요. 자랑도 아니고.

이철권 그러니깐 정신 똑바로 차리랑께. 여가 어디냐? 눈 감으면 코도 베간 다는 서울 아니냐.

이동석 아버지도 언제 적 얘길 하세요. 그리고 저 그렇게 바보 아녜요.

이철권 네가 시방 세상 물정 몰라서 그래야. 건강원 정씨 얘기 모르냐? 그 양반이 얼매나 똑똑하냐. 그란데도 사기꾼들한테 당했당께.

이동석 시골 아재 똑똑해 봤자죠.

이철권 그 양반이 이장 하면서 이장협의회장까지 했당께. 정씨만한 인물이 없어야.

이동석 어떻게 당했길래 그래요?

이철권 정씨가 다른 건 몰라도 관공서 서류는 좀 볼 줄 알잖냐.. 그란데도 당했당께. 토지대장, 등기부등본, 신분증까지 전부 위조해서 내미는데 안 당할 수 있었겄냐?

이동석 그렇게 덤벼들면 누가 안 당해요?

이철권 그랑께. 우리 같은 시골도 그 모냥인데, 여는 얼마나 더 그러것냐? 그래서 내가 따라온 것이여. 하여튼 중개사 양반, 내가 오늘 좀 거시기하게 할랑께 너무 뭐라 그러지 마시소. 뭐든 정확한 게 좋은 거 아니겄소?

여직원 어르신 편하신대로 하셔야죠.

박민식 거시기 하든, 뭐시기 하든 후딱 시작하시죠.

여직원이 의자를 가지고 와 테이블 가운데에 앉는다. 테이블에 계약서와 등기부등본을 놓는다.

이철권 (일어서면서) 쫌만··· 이거 쪼까 보고 합시다. (벽쪽으로 가서 액자에 걸려있는 자격증을 유심히 쳐다본다.)

여직원 왜 그러세요?

이철권 여가 공인중개사인 것 같은디, 그라믄 아짐씨는 뭐다요?

여직원 저야 여기 직원이죠.

이철권 그라믄 시방 공인중개사도 없이 계약서 쓰겠다는 소리요? 이런 계약서는 필히 공인중개사가 있어야 하는 걸로 알고 있는디.

여직원 이런 거는 실무적인 거라 대개는 직원들이 다 해요. 어차피 이 계약에 대한 책임은 공인중개사가 지는 거고 그래서 계약서에 공인중개사 도장을 찍거든요.

이철권 그라도 그라믄 안되지라. 원칙대로 해야 되지 않것소? 중개사 양반은 어디 갔소?

여직원 잠깐 나가셨어요.

이철권 빨리 오라 하소. 중개사 양반이 있어야 할텐께 빨리 연락 하소.

박민식 그냥 이대로 하시죠. 스케일링 안해 보셨어요? 어디 의사가 스케일링 하나요? 다 간호사들이 하지.

이철권 아까도 나가 말씀드렸잖소. 요새 세상이 장난이 아닌께 나가 쪼매난 거 까지 거시기 허것다고. 무더요? 빨리 전화 안 하고.

여직원이 중개사와 통화하는 모습이 소리 나지 않는 과장된 몸짓으로 보여진다.

여직원 거의 다 오셨대요.

이철권 그라믄 그 때꺼징 집이나 한 번 더 보고 오것소. 집에 사람 있겄지요?

여직원 새댁 있어요.

이철권과 이동석이 퇴장한다. 이후 사무실 전화벨이 울리고 여직원이 받는다.

여직원 그린피아 부동산입니다. (사이) 맞고요, 줄 수 없다시네요. (사이) 그렇게 흥분하실 일이 아녜요. (사이) 그랬다고요? 잠시만요. (수화기를 가린 채) 이 분, 거기 세입잔데요, 집주인은 그 계약금을 주기로 했다네요. 한번 받아보실래요?

박민식 볼 일 없다니까요.

여직원 (다시 전화기로)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으니까 다시 한번 확인해 보세요. (전화를 끊는다.) 여기도 보통이 아니네···

공인중개사가 박민식을 바라보며 들어온다.

중개사 (턱으로 가리키며) 그 분이셔?

여직원 매도자시고요, 대리인. 매수인은 집 본다고 나가셨어요.

이철권과 이동석도 들어온다.

이철권 아따 누가 있기는 개뿔··· 뭐 하나 딱부러지는 게 없구만.

중개사 아무도 없었어요?

이철권 뉘시당가요?

여직원 중개사님이세요.

이철권 (악수를 청하며) 오매 그러요. 허벌나게 올라와 갖고 공인중개사도 없이 계약할 뻔 안 했소.

중개사 중개사는 주로 잔금 지급시만 참석하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이철권 그려도 원칙대로 해야 안 쓰것소.

박민식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빨리 좀 합시다. 제가 그렇게 한가한 놈이 아니거든요.

중개사는 여직원이 앉았던 의자에 앉고 이철권과 이동석은 아까 자리에 그대로 앉는다.

중개사 중개 물건은 그린피아 아파트 305동 1005호이고 매매계약에 관한 사항입니다. (등기부등본을 두 사람에게 나눠주고) 오늘 현재 담보계약 사항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철권 한 가지 확인하고 넘어가야 쓰것소. 이 등기부등본은 어데서 뗀 거요?

여직원 (중개사가 쳐다보자) 인터넷에서 뗀 거죠.

이철권 그게 아니지라. 등기부등본이라는 게 등기소에서 떼는 건데 아무데서나 뗀 걸 우째 믿는다요?

이동석 요새는 편리해져서 인터넷에서 다 떼요.

이철권 마··· 이노마가. 아즉도 정신을 못 차렸네. 아무리 세상이 편리해졌어도 따질 건 따져야 헌다고 했냐 안했냐? 정씨가 안 그려서 당했당께.

박민식 여기 트집 잡으러 오셨어요? 그래서 어쩌라는 겁니까?

이철권 등기소 가서 다시 떼 와야재.

박민식 요새 누가 등기소가서 등기부등본 뗍니까? 참, 답답한 사장님이네.

이철권 그런 말 마시소. 이게 몇 십만원짜리 리어카도 아니고 몇 억이나 되는 아파트요. 파는 양반이야 팔면 그만이겠지만 사는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랑께요.

중개사 알겠습니다. 저희가 등기소 다녀오겠습니다. (중개사가 눈짓하자 여직원이 일어선다.)

이철권 너도 따라가 봐라.

이동석 저도요?

중개사 저희는 믿으셔도 됩니다. 저희는 중개하는 입장이니까요.

이철권 잔금 치를 땐 우리가 직접 뗄 거니까 같이 댕겨 와. 어디 붙어 있는지 봐두란 말이시.

여직원과 이동석, 퇴장한다.

박민식 이 집, 싸게 나온 지 아시죠?

이철권 들었는디, 그기 새발의 피더만요.

박민식 내 말뜻을 잘 모르시네. 사장님네가 이런 식으로 태클 걸 위치가 아니란 말입니다. 다른 매수자였다면 끝났어도 벌써 끝났을 거란 말입니다.

이철권 쪼까만 더 양해를 해주시소. 아, 집이 몇 억씩 가는디 그렇게 후다닥 할 수 있간디요. 그래서 그러는디 중개사 선생, 우리가 이 집을 사갔고 이사를 했는디 집에 무슨 하자라도 생기면 중개사 선생하고 매도하신 분이 모든 책임을 진다는 각서 한 장 써줬으면 좋것소. 나도 이렇게 큰 거래는 처음이라 실수할까봐 그러요.

중개사 그런 거 대비해서 계약서 쓰는 거죠. 따로 각서 같은 건 쓰지 않습니다.

이철권 그라믄 계약서에 하자 발생 시 모든 책임을 진다는 게 포함됐다는 말이요?

중개사 그렇지는 않죠. 중개업자는 현 상태에 대한 사항만 책임을 지는 거죠.

이철권 아니, 그라믄 무더러 부동산에서 계약을 한다요? 복비도 한 두 푼이 아닌디. 몇 억씩 되는 돈을 누굴 믿고 빚까지 진단 말이요.

중개사 그런 건 있습니다. 가령 집을 매매했는데, 싱크대에서 누수가 일어나 아래층에 피해를 주거나 했을 때는 6개월 이내라면 매도인측에서 하자보수하는 걸로 돼 있습니다.

이철권 그랑께, 그런 걸 각서에 써주라는 말이요.

중개사 제가 중개사 하면서 그런 걸로 각서 써본 적 없습니다. 그러니까 못미더우시면 집을 좀 더 꼼꼼히 볼 수밖에 없습니다.

박민식 엄청 잘 따지고 꼼꼼하시면서 뭘 걱정합니까?

이철권 시상이 어데 내 맘대로 되간디요? 정씨 그 양반 참말로 불쌍허요. 뭐 어디에 종양인가 뭐시긴가 있는 모양인디 다 털려갔고 그걸 못 떼네고 있다고 하잖소. 열심히 살면 뭐하것소. 지켜야 할 것 못 지키믄 그걸로 끝인 거요, 끝.

등기소 갔던 두 사람이 돌아온다. 여직원이 등본을 이철권과 박민식, 중개사에게 한 부씩 건네준다.

중개사 전에 거랑 다른 거는 없을 겁니다. 계속해서 소유자는 김용성씨로 오늘 오신 분은 매도인의 대리인입니다. 즉, 매도인 측에서는 대리계약 하시겠습니다.

이철권 그럼 뭐여, 시방 이 사람이 집주인이 아니라는 소리요?

여직원 그거는 제가 미리 아드님한테 말씀드렸는데요. 집주인이 해외 체류 중이라 계약 때는 못 보고 잔금 때나 볼 수 있다고요.

이동석 위임장은 해 오셨겠죠?

박민식 그런 소리 못 들었는데.

여직원 그거는 제가 말씀 안 드렸어요. 계약서에 대리 계약 사실이 들어가니까 굳이 위임장 안 써도 되거든요.

이동석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제가 위임장 있어야 된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잖아요.

이철권 아따, 시방 뭔 일을 고로코롬 한다요?

박민식 위임장 쓰면 되잖아요. (도장과 주민등록증을 꺼내 테이블에 놓으며) 여기 주인 거 있잖소. 그 딴 거 쓰면 되는 거지.

이동석 아니죠. 이렇게 쓰는 건 위임장이 아니죠. 주인이 직접 써야 위임장인 거죠.

박민식 신분증과 도장 줬으면 위임한 거지, 그 따위 종이 쪼가리가 뭐가 중요하다고 그럽니까?

중개사 위임장은 하나의 형식이고요, 우리가 집주인과 통화도 했고 매매 의사도 확실히 확인했으니까 믿으셔도 됩니다. 말했듯이 계약서에 대리 계약임에 들어가고 잔금 때는 집주인이 반드시 나와야 되니까요.

이철권 동사무소서 남의 등본 뗄 떼도 위임장 있어야 되는디, 시방 몇 억짜리 집 사믄서 위임장도 없이 하라는 말이요?

중개사 위임장 없이 하라는 것이 아니라요, 집주인 매매 의사를 확인 했으니까 우릴 믿고 진행하셔도 괜찮다는 말입니다.

이철권 내가 시방 중개사 양반 하는 걸 보니까 믿을 수가 없소. (테이블 위의 신분증을 집어 아들한테 주며) 이 양반 연락처나 줘 보소.

박민식 그건 왜 찾는데요?

이철권 우리가 통화해 보겠다는 거 아니요.

중개사가 손짓하자 여직원이 메모지에 전화번호 써서 넘겨준다. 이동석이 그걸 받아 전화를 건다.

박민식 해외니까 빨리 끝내야 할 거요.

이동석 김용성씨죠? (사이) 오늘 계약 하기로 한 매수자에요. 대리인이 나오셔서··· 주민등록번호 좀 불러 봐 주세요. (사이) 갖고 계신 아파트가? (사이) 동 호수는요? (사이) 파시는 거 맞죠? (사이) 대리인과는 무슨 관계세요? (사이) 예, 알겠습니다. (끊는다.) 문제 없네요.

박민식 아예 조서를 쓰지 그러세요.

이철권 중개사 양반한테 허점이 많으니께 이러는 거 아니요. 그래서 하는 얘긴디 아까 말했던 각서를 꼭 받아야 쓰것소. 이렇게 불안혀서 어디 계약 허것소?

중개사 이젠 더 특별히 불안해하실 건 없습니다.

이철권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되지라. 등기부등본도 문제, 위임장도 문제, 앞으로 또 뭔 일 안 생긴다고 장담할 수 있간디요. 꼭 받아야 쓰것소.

중개사 알겠습니다. 부동산하면서 이런 적 한 번도 없지만 제 자존심 다 버리고 써 드리겠습니다. 써 드리죠.

이철권 암만, 그래야재.

중개사 (여직원에게) 각서 좀 만들어. 매매 이후 발생한 하자까지 모두 책임진다는 걸로.

중개사는 다시 계약서를 쓰기 시작한다.

중개사 매도자 주민등록번호··· 주소··· 연락처 그리고 계약자는··· (박민식에게) 신분증 좀 주세요. (신분증을 받아서 기록한다. 끝나고 돌려주는데 중간에서 이철권이 가로챈다.)

박민식 뭡니까?

이철권 집주인을 직접 못 봤응께 대리인이라도 잘 봐 놔야 하지 않것소. (신분증과 박민식을 번갈아가며 쳐다본다. 미심쩍다는 듯 일어나 박민식 앞으로 신분증을 내밀며 다가간다.) 본인 맞소?

박민식 정말 뭐하시는 겁니까?

이철권 여는 턱이 사각인데 실물은 안 그래서 그러요. 네가 함 봐라. (이동석에게 신분증을 넘긴다. 이동석이 받아 비교한다.)

이동석 조금 그러네요.

박민식 살 빠져서 그런 거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자꾸 지체시킬 겁니까?

이철권 중개사 양반이 한번 보고 말해 보소. (다시 신분증을 중개사한테 넘긴다.)

중개사 몰라보게 살 빠진 거네요. 한번 봐봐. (다시 여직원에게 신분증을 넘긴다.)

여직원 사진이 오래 되긴 했지만 본인 틀림없어요.

이철권 복비 받는다고 대충 허지 말고 잘 좀 보소.

여직원 여자들 사진은 이보다 더 해요. 완전히 딴 사람 같다니까요.

이철권 그거하고 이거하고 같소.

박민식 지금 신분증 위조라도 했다고 이러는 겁니까?

이철권 솔직히 말혀서 이런 주민증 위조하는 건 일도 아니라고 그럽디다.

박민식 우와, 그래서요··· 그래서요?

이철권 미안허요. 뭐, 댁이 그렇다는 건 아니고.

이동석 주민등록증 위변조 확인하는 사이트가 있어요. 기왕 이렇게 된 거 한 번 알아보고 가죠.

이철권 그라재. 인제 네가 지대로다.

박민식 문제없으면 어쩌실 건데요?

이철권 당연한 건데, 우짜긴 뭘 우짠다요. 무더냐? 빨리 조회 안하고.

이동석이 일어나 책상으로 가서 여직원과 함께 신분증을 조회한다.

이동석 (자리로 돌아가며) 이상 없어요.

박민식 봤죠, 이제 한 번만 더 늦어지면 이 계약 엎습니다.

중개사가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다음 박민식과 이동석에게 나눠준다.

중개사 계약서는 다 됐고요, 이제 매수자께서 계약금만 입금하시면 됩니다. 준비해 오셨죠?

이동석 계좌이체 할 겁니다.

이동석이 휴대폰을 들고 계좌이체를 시도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이철권 왜 그러냐?

이동석 보이스피싱 때문에 이체 한도를 줄여놨더니 안 되네요.

이철권 그라믄 우짠다냐?

이동석 직접 가야죠.

이철권 빨리 갔다와라.

이동석, 계약서를 들고 퇴장한다.

박민식 경찰이나 된 것처럼 밀어붙이더니 본인들 일은 잊으셨나 봐요.

이철권 미안케 됐는디, 금방 되니깐 쫌만 기다려 주시소.

여직원이 다 된 각서를 중개사에게 준다. 중개사가 사인하고 박민식에게 내민다.

박민식 뭡니까?

중개사 아까 매수인께서 부탁하신 각서입니다. 매매 이후 발생하는 모든 하자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는 내용입니다.

이철권 암만, 믿을 게 없는 세상이니 이런 거라도 있어야재.

박민식 정말 보자보자하니까 너무 하시네. 등기부등본도 못 믿겠다, 신분증도 못 믿겠다, 무슨 정신병자처럼 굴더니 이제는 나중 일까지 책임지라고요? 그렇게 떳떳하게 요구하실 거면 본인들 일이나 잘 챙기시지, 계약금 한 푼 못 받은 사람한테 이 따위 각서에 사인하라고요?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갑질은 그 쪽이 아니라 내가 하는 겁니다. 내가··· 정신 차리세요.

이철권 화기 단디 나신 모양인디, 오해하진 마시소. 내 딴에 꼼꼼하게 하려고 그런 거니께.

중개사 이런 각서는 어디서도 안하는 거니까 매수인께서 좀 양보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집을 꼼꼼히 보셔서 문제 있는 건 잔금 때 집주인한테 얘기하시는 걸로 하고요.

이철권 찜찜하기는 하지만 뭐, 어쩌것소 그렇게 해야재.

이 때, 5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급하게 뛰어 들어온다.

집주인 누구요? 누가 1005호 계약하려는 거요?

중개사 무슨 일로 오셨어요?

집주인 여기서 계약하려 한다면서요? 그린피아 305동 1005호

중개사 맞는데, 무슨 일이신지?

집주인 (격앙돼서) 그거 안 돼요. 안 된단 말이요, 내가 집주인인데 누구와 계약한다는 거요?

이철권 울 아들이 집주인이랑 쪼까 전에 통화 했는디.

집주인 내가 진짜 집주인이라고요, 집주인.

박민식이 고개를 숙인 채 나가려한다.

중개사 어디가세요? 저 분이 대리인인데요.

집주인이 나가려는 박민식을 붙잡는다.

집주인 당신이 뭔데 남의 집을··· 어디 면상 한 번 보자.

외면하려는 박민식을 집주인이 거세게 돌려 세운다.

집주인 너··· 박민식 맞지?

박민식 오셨어요?

집주인 이젠 사기까지 치냐?

박민식 그런 말씀 마세요. 제 돈 떼먹은 건 괜찮고요?

집주인 내가 네 돈을 왜 떼먹어?

박민식 6개월치 안 주시고 가버렸잖아요.

집주인 그거야 네 놈이 감방에 있었잖아. 또 한 번 콩밥 먹어 볼래?

박민식 사장님도 한 번 드셔보시죠. 나도 고소란 걸 해놨거든요.

박민식이 집주인을 뿌리치고 달아난다.

이철권 시방 뭐, 뭐여? 사기꾼! (급하게 전화를 한다.) 돈 넣었냐? (사이) 사기야, 사기. 넣지 마. (사이) 그래 넣지 말라고. (사이) 그냥 오란 말이시. (끊는다.)

중개사 진짜 집주인 맞으세요?

집주인 (신분증을 보여주며) 이거 보시면 알잖아요. 집주인 맞아요.

중개사 (테이블의 가짜 신분증과 비교하며) 그럼 이건··· 해외에 계시다고 그랬는데···

집주인 어제 들어왔소. 부동산에 집도 내놓고 세입자한테 돈도 줄겸 왔는데··· 세입자가 재촉했기 망정이지.

중개사 대리인은 아시는 사이 같던데요?

집주인 대리인은 무슨··· 베트남 가기 전에 잠깐 데리고 있었던 놈이에요. 노름판에 집적대다 여러 번 감방 다녀왔죠.

이철권 (중개사한테) 당신 뭐여? 한 패거리 아녀?

중개사 죄송합니다.

집주인 벌써 계약을 했다는 겁니까?

여직원 계약서는 다 썼습니다.

집주인 그거 무효에요. 집주인이 여깄는데 무슨 계약입니까?

중개사 돈 아직 안 넣었죠?

이철권 쫌만 늦었으면 우짤뻔 했소?

중개사 계약금 들어갔더라도 무효이긴 하지만, 어쨌든 계약은 안 된 겁니다.

집주인 왜 집주인한테 연락도 안한 겁니까?

여직원 대리인이 집 내놓을 때 우리가 연락했고요, 오늘도 여기 매수인께서 직접 통화하셨어요.

집주인 난 전화 받은 적 없는데···

이철권 한 패거리 아니것소. 갸들은 절대 혼자서 사기질 안 헌다요. 그랑께 바보같이 속는기지.

이동석이 급하게 등장한다.

이동석 신고 했어요?

이철권 벌써 토꼈다.

이동석 정말 대기자 많았기 망정이지.

이철권 액땜한기야. 너네 잘 살라고 굿 한 번 옹골지게 한기다.

이동석 (중개사에게) 이딴 식으로 하는 게 어딨습니까?

이철권 됐다. 보통 놈들이 아니었승께. 나가 그렇게 유난을 떠는대도 사기 치려던 놈들 아녀. 다행히 돈은 보존했응께 딴 데 알아보자.

중개사 정말로 죄송하게 됐습니다.

사과하는 중개사를 외면한 채 이철권과 이동석이 퇴장한다. 동시에 세입자가 들어온다.

집주인 (반갑게 맞이하며) 덕분에···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세입자 맞죠? 뭔가 이상했죠?

집주인 내 신분증까지 위조했더라고요.

세입자 사기였군요. 어쩐지··· 분명 저랑 얘기하실 때는 계약금 돌려주기로 했는데도 안 주겠다고 그러더라고요.

집주인 그 놈이 거기까진 생각 못했겠죠.

여직원 왜 그렇게 싸게 내놨는지 알 것 같네요.

집주인 얼마에 내놓았죠?

여직원 3억 5천이요. 시세보다 천만원이나 싸죠.

중개사 주인 사정을 모르면 이렇게까지 하지 못할 텐데요?

집주인 시장 사람들한테 들었을 거예요. 거기 사람들은 내가 귀국해서 집 팔고 지방으로 간다고 알고 있거든요. 그 놈은 거기 친목회에서 굴러먹던 놈이고요.

중개사 귀국하자마자 이런 일 겪으시고··· 많이 놀라셨겠어요?

집주인 그보다도 앞으로가 걱정이에요. 세상 변하는 게 만만치가 않을 텐데 나 같은 사람이 제대로 따라갈 수나 있을지 모르겠어요. 오늘은 다행히 세입자분이 연락해줘서 대처할 수 있었지만요.

세입자 돈 때문에 연락했던 거죠.

집주인 (속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세입자에게 주며) 돌려 주기로 한 계약금이에요. 영수증 부탁해요.

세입자 (봉투을 열어보고) 그런데 제가 수표는 받을 수 없는데요.

집주인 왜요? 약속한 돈이잖아요?

세입자 내일부터 주말인데 찜찜하잖아요.

집주인 그냥 은행에 넣으면 되잖아요.

중개사 지금 넣으면 월요일이나 현금화가 되니까 그렇다는 거죠?

세입자 맞습니다.

집주인 위조 수표 줬을까봐 그래요?

세입자 그런 게 아니라, 전 뭔가 개운치 않으면 잘 쉬지를 못하거든요.

집주인 아무리 그래도 2천만원을 현금으로 갖고 다닐 수는 없잖아요.

세입자 현금을 원하는 게 아니라 제 계좌로 이체해 주셨으면 하는 거예요.

집주인 이거나 그거나 다를 게 뭐가 있어요? 그리고 내 계좐 지방이라 여기 지점도 없어요.

세입자 죄송하지만, 하여튼 전 받을 수 없어요.

집주인 달라할 때는 언제고 주니까 안 받는 건 무슨 경운지 모르겠네.

중개사 이렇게 하시죠. 우리가 오늘 실수한 것도 있으니까 그 수표 우리가 받고 세입자한테 이체를 해드리죠. 우리는 은행 VIP라 바로 현금화 할 수 있으니까요.

집주인 굳이 그렇게까지···

세입자 저는 좋습니다.

집주인 그렇다면··· 뭐, 그렇게 하죠.

중개사 (세입자에게) 수표를 주세요. 계좌번호도.

세입자가 수표와 계좌번호를 여직원에게 준다. 여직원이 인터넷뱅킹을 한다.

여직원 다 됐어요.

세입자가 휴대폰으로 입금 확인을 한다.

세입자 잘 들어 왔네요. 수표 사진 좀 찍을게요. (여직원 책상으로 가서 책상 위의 수표를 찍는다.)

집주인 그건 뭐 하러 찍어요? 잘 들어왔다면서요.

세입자 혹시나 해서요.

중개사 그러면 이제 다 됐습니다. 수표는 바로 입금해.

여직원이 수표를 들고 퇴장한다.

집주인 그럼, 잔금 날 보죠.

세입자 가시기 전에 각서 한 장 써주셨으면 해요.

집주인 무슨 각서요?

세입자 만기 날 틀림없이 잔금을 지급하겠다는 각서요.

집주인 만기 때 전세금 다 주는 게 당연한데 무슨 각서를 써요?

세입자 오늘 사기 당할 뻔 하셨다면서요? 누굴 믿을 수 있겠어요?

중개사 계약서 있잖아요. 그거 있으면 되는 거예요.

세입자 전세금만 2억 2천이에요. 할 수 있는 건 다 해 놓을 생각이에요.

집주인 알았어요. 무슨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써 줄게요. 대신 집 보러 오면 잘 보여주셔야 해요.

세입자가 각서를 작성하고 집주인이 거기에 사인한다. 되돌려 받은 각서를 갖고 세입자 퇴장한다.

집주인 원래 세상이 이런 건지 적응하기가 어렵네요.

중개사 잘하는 거예요. 저래야 잘 살 수 있거든요.

집주인 그런가요? (사이) 그럼, 이만.

집주인도 인사하고 퇴장한다. 혼자 남은 중개사, 잠시 동안 무심히 테이블을 정리한다. 그런데 이 때, 은행 갔던 여직원이 급하게 뛰어 들어 온다.

여직원 집주인 갔어요?

중개사 갔지. 왜 그래?

여직원 수표가 사고 수표래요.

중개사 무슨 소리야?

여직원 울산 어디 농협에서 분실한 수표 용지래요. 거기다 썼다고···

중개사 그래서 입금 못한 거야?

여직원 당연히 안 되죠.

중개사 대체 오늘 왜 이러냐? 빨리··· 멀리 못 갔을 거야.

중개사가 뛰쳐나가고 뒤이어 여직원도 쫓아 나간다.

암전.

- 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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