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스크린엔 여러 영화들이 명멸했다. 개봉작만 1,475편(영화진흥위원회 집계)이었다. 외화는 1,142편이 개봉해 영화팬들의 선택을 기다렸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워’(867만6,320명)처럼 흥행이란 수식을 얻은 영화들이 있었으나 대부분은 소리소문 없이 극장을 찾았다가 조용히 물러났다. 좋은 영화라고 반드시 흥행하고, 나쁜 영화라고 관객의 환대를 받지 말라는 법은 없다. 영화의 완성도와 시장의 평가는 대체로 불일치다. 시장의 박대를 받았다고 수작의 가치는 변질되지 않는다. 올해의 마지막 날, 올해를 조용히 빛낸 영화들을 마주하는 시간은 어떨까. 큰소리 내지 않고 존재를 스스로 빛낸 외화 5편을 권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80세 노장 감독 켄 로치의 신작이다. ‘블루칼라의 시인’이라는 별명을 지닌 노장이 세월에 굴하지 않고 여전히 약자의 존엄을 이야기한다. 사회가 외면해온 패배자의 삶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 따스하고 애처로우면서도 냉정하다.
40년 경력의 목수 다니엘(데이브 존스)은 억울하다. 주치의가 심장병 악화를 이유로 퇴직을 권했는데 복지센터에서는 일할 수 있는 몸이기에 의료수당을 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센터는 되려 액수가 적은 실업수당을 신청하라 하고 구직 노력을 기울일 것을 강권한다. 의도치 않게 삶의 함정에 빠진 다니엘은 불평하면서도 실업수당을 받으려 하나 온갖 장애물이 앞에 있다. 인터넷은커녕 컴퓨터조차 못 하는 그에게 센터는 모든 지원 신청은 온라인으로만 가능하다고 외치고, 구직 노력을 문서로 보여주길 원한다. 험로를 걸으면서도 다니엘은 우연히 알게 된 싱글맘 케이티(헤일리 스콰이어)의 어려운 처지를 돕는다. 얇은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케이티의 끼니를 해결해주고, 아이들을 기꺼이 돌봐준다.
경제적으로는 하위권일지 모르나 시민으로서는 일류인 다니엘은 결국 자신의 자존을 지키기 위해 센터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다. 관료제의 안일과 신자유주의의 효율에 빠져있던 센터 직원들도 손을 들고 다니엘의 입장에 귀를 기울이게 되나 삶의 아이러니가 그를 습격한다. 올해 칸국제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 수상작. 관객 5만1,417명(상영 중).
다가오는 것들
친정엄마가 세상을 뜨고, 남편은 다른 여자의 남자가 된다. 딸은 결혼해서 엄마가 되고, 절친한 제자는 사상의 반기를 든다. 자신의 책을 내놓은 출판사는 지적인 면모를 강조했던 예전과 달리 요란한 장식으로 독자를 꾀는데 집중한다. 고등학교 철학 교사 나탈리(이사벨 위페르)가 어느 정도 예견했고 일견 기대했던 일들이다. 세상은 늘 좋은 방향으로 향하는 것은 아니니까, 모든 것은 시간에 의해 마모된다는 것을 아니까, 모든 삶은 오르막을 거쳐 절정을 지나 내리막으로 향한다는 것을 오래 전 깨달았으니까, 나탈리는 이런 현실을 그리 고통스레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쓸쓸하다. 조울증 환자 친정엄마는 성가신 존재였으나 세상을 뜨니 빈자리가 크다. 남편과 아이들의 부재도 고독감을 더한다. 언제나 자신만을 영웅으로 봐라 볼 줄 알았던 제자는 사상적 독립을 선언했다. 언젠가 ‘다가오는 것들’이라 알고 있었으나 마침 닥치니 헛웃음과 울음이 섞여 나온다.
그래도 나탈리는 담담함을 유지한다. 노년의 사랑 따위로 시간을 되돌릴 생각도 없고, 그저 받아들인다. 영화는 그런 나탈리의 모습을 차분히 관조하듯 바라본다. 인생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몸부림치지 말고 시간이 빚어낸 얄궂은 변화를 받아들이라고, 그것이 바로 삶이라고 웅변한다. 프랑스의 신진 감독 미아 한센 러브의 역량이 빛나는 수작.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 감독상(은곰상)을 받았다. 관객 3만2,355명.
캡틴 판타스틱
아이들은 숲에서 지낸다. 언뜻 보면 방치된 듯한데 실상은 다르다. 운동으로 몸을 단련하고, 독서로 마음을 키운다. 아버지 벤(비고 모텐슨)은 가부장이 아닌 가족의 리더로서 아이들과 소통하며 그들만의 ‘신세계’를 만들어간다. 히피 정신으로 무장한 가족의 삶에 어느 날 균열이 인다. 조울증 치료를 위해 요양 중이던 벤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엄마가 자살하면서 히피 가족은 예상치 못했던 여정에 나서고 삶의 시험대에 선다.
벤의 장인은 장례식 참석 자체를 완강히 반대하고, 벤을 아동학대혐의로 고발하려 한다. 자신의 재력으로 아이들을 ‘정상적’으로 키우겠다고까지 주장한다. 숲을 떠나 평범한 삶을 살고 싶은 넷째 렐리안의 욕망과, 명문대학 입학허가증들을 손에 쥔 첫째 보의 번민이 히피 가족을 흔든다. 철인을 꿈꾸며 새로운 세상과 삶을 일궈왔던 가족들은 과연 어떤 미래를 맞게 될 것인가.
도발적이면서도 흥겨운 음악과 리듬감 있는 카메라 움직임만으로도 심장이 뛰게 되는 영화다. 엉뚱한 가족의 모험 아닌 모험이 미소를 짓게 하며 큰 생각거리를 던진다. 올해의 발견이나 지칭해도 과하지 않은 수작. 감독 맷 로스. 관객 1만4,322명.
로스트 인 더스트
토비(크리스 파인)는 딱히 잘못 살지도 않았는데 삶의 벼랑 끝에 섰다. 어머니 치료를 위해 주택담보대출을 받았다가 소액의 빚 때문에 대대로 살아온 농장을 날릴 판이다. 이혼 뒤 아내와 사는 아이들에게 남겨줄 유산조차 없는 삶, 교도소를 전전하며 인생을 낭비한 전과자 형 태너(벤 포스터)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 다른 삶의 궤적을 살다 어쩌다 보니 비슷한 처지에 놓인 형제는 총을 든다. 은행 빚을 갚을 돈만 은행에서 털 계획을 짜고 작은 도시를 돈다. 이들의 ‘소박한’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된다. 은퇴를 앞둔 경찰 마커스(제프 브리지스)가 형제의 강도 행각 저지에 나서면 상황은 반전된다.
성실히 살아도 밑바닥을 벗어날 수 없는 빈곤층의 반란을 세묘한 영화다. 토비와 태너는 비뚤어진 인생 역전을 꿈꾸나 돌을 던지기 어렵다. 사악한 금융자본이 탐욕으로 없는 자들의 삶을 옥죄기 때문이다. 영화는 큰 악은 용서되고, 작은 악은 처벌 받는 세상의 부조리를 통박하며 묘한 쾌감과 더불어 쓸쓸함을 안긴다. 마커스의 입장에서 형제의 잘잘못을 따지기 보다 카메라는 중간에 서서 미국적 삶의 왜곡을 관찰한다. 황량한 텍사스를 배경으로 ‘바람 위에 쓴 편지’(1956)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 등 고전영화를 소환하며 21세기판 서부극을 완성해낸다. 원제는 ‘Hell or High Water’. ‘어떤 난관이 닥치든’으로 해석될 수 있는 제목이다. 어떻게든 지옥 같은 세상으로 살아남으라는 감독의 독려로 읽힌다. 감독 데이비드 매킨지. 관객 8만1,236명.
자객 섭은낭
고위관료 집안에서 나고 자란 여성은 어려서부터 정혼자가 있다. 원치 않게 이별을 한 뒤 비밀조직에서 부패 관리를 살해하는 암살자로 거듭난다. 시공간적 배경은 당나라. 영화는 무협영화의 장르적 외관과 다르다. 빠른 박자로 전개 되리라 여겨지는 사연을 정적이고 우아하게 펼쳐낸다. 옛 정혼자인 전계안(장첸)을 죽여야 할 숙명을 마주한 섭은낭(수치)이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을 수려한 영상으로 전한다. 남성적 장르로 소비될 운명을 지닐 이야기를 여성의 사회적 각성의 과정으로 해석해내는 감독의 노련하고도 세련된 손길이 수작을 빚어낸다.
대만영화의 대가 후샤오시엔의 첫 시대극이라 기획 당시부터 조명을 받았던 작품이다. 와이어를 활용한 액션 장면을 미적 영역으로 끌어올리고, 인물들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아름답게 표현해낸 연출력 만으로도 볼만하다. 올해 칸국제영화제 감독상 수상. 관객 1만5,747명.
라제기 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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