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없는 사회’(민들레, 2016)를 가리켜, 연말 혹은 정초에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해도 우치다 타츠루(內田樹)는 섭섭한 내색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책을 늘 재미있게 읽어 온 나로서는 그를 우스갯거리 삼을 생각이 없다. 내가 처음으로 읽었던 우치다의 ‘하류지향’(민들레, 2013)은 늘 혼란스러웠던 엘리트의 정의를 명료하게 다듬어 준다. 사전은 엘리트(elite)를 “어떤 사회에서 뛰어난 능력이 있다고 인정되거나 높은 지위에 올라 지도적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정의하고, 언론은 명문대 출신이나 정치인 의사 변호사 교수 따위를 마구잡이로 엘리트라고 지칭한다. 사전과 언론은 다 틀렸다. 엘리트는 ‘장소’ 오로지 ‘장소’와 긴밀하게 연관된 사람이다.
엘리트와 장소를 맺어주는 뛰어난 은유는 국방이다. 플라톤의 ‘향연’(이제이북스, 2010)과 ‘라케스’(이제이북스, 2104)를 보면 아테네가 보이오티아와 한판 대결을 벌였던 델리온 전투에서 소크라테스가 얼마나 용맹하게 싸웠는지가 묘사되어 있다. 라케스가 말한다. “다른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와 같은 사람이고자 했다면, 우리나라는 올바르게 서 있을 것이고, 그때 그와 같은 참패를 당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입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지휘했던 남명 조식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 때(4월 29일~5월 4일) 한인타운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고 결집했던 예비역과 한인 유학생들이 엘리트다.
군인이라야 엘리트라는 말이 아니다. 군인처럼 자기 장소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이 엘리트라는 말이다. 이런 해석은 고무적이다. 소위 명문대를 나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또 정치인 의사 변호사 교수 같은 고소득 직종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장소를 가꾸고 지키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엘리트다. 풀뿌리 지역 활동가들, 혹은 지역 경제를 잠식하는 가맹점 가입을 거부하고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구멍가게를 연 사람들, 그들이 엘리트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렇다.
문제는 오늘의 교육이 장소와 엘리트의 연관성을 계속 파괴해 왔다는 것이다. 우치다가 한탄했던 일본이나 한국의 교육 관계자들과 대학은 ‘글로벌 인재(Global Elite)’를 육성하는 데 혈안이 되어있다. 장소와 결합한 것이 엘리트라는 관점에서 볼 때, 글로벌 인재란 ‘뜨거운 아이스크림’과 같은 형용모순이다. 영어와 높은 이동성으로 무장한 글로벌 인재는 교육(학교)이 국민국가의 내부 장치라는 것을 아랑곳 하지 않는다. 교육의 목표는 차세대 국가를 책임질 수 있는 성숙한 시민의 육성이지만, 글로벌 인재는 어떠한 공동체에도 귀속되지 않는다. 장소에 기반을 두지 않는 것이 장점인 글로벌 인재들의 기동성은 혁명이나 변혁을 일으키기보다, 자신이 더 잘 적응할 수 있는 나라로 이민을 하는 것으로 그것을 대신 한다. 나아가 제1세계에서 성공한 글로벌 인재는 그 후광으로 쉽게 고국의 공직을 꿰차거나 제1세계의 대리인이 된다.
존 버거의 ‘제7의 인간’(눈빛, 1992)에 따르면, 이민은 그 나라에서 가장 진취적이고 용감한 사람이 선택하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민은 한국에서 가장 진취적이고 용감한 사람이 외국으로 빠져나가는 대신, 남은 한국인은 제3세계에서 떠밀려온 가장 뛰어난 인재들 그리고 제1세계에서 성공하고 귀환한 글로벌 인재와 경쟁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앞으로 우리가 직면해야 할 이중고다.
“권력은 기업으로 넘어갔다”(노무현), “청년들이 눈높이를 낮추면 일자리가 있다”(이명박)같은 말들은 대통령의 품격에 맞지 않는 말이다. 대통령은 “권력은 국민에게 있다”고 말해야 하고 “우리가 도울 테니 네 꿈을 마음껏 펼쳐보라”고 말해야 한다. 이보다 더 부적절하기로는 박근혜 대통령의 “청년이 텅텅 빌 정도로 중동진출을 해보라”는 말이다. 이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아니라, ‘화전민 부락의 촌장’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이런 말을 내뱉고서도 광복절 축사에서는 “우리나라를 살기 힘든 곳으로 비하하는 신조어(헬조선)”를 비난했다니 기가 절로 막힌다. ‘어른 없는 사회’는 이 칼럼보다 재미있다.
장정일 소설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