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오바마 대통령, 냉전종식 이후 최대 ‘對 러시아’ 제재 단행
임기를 3주일 가량 앞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냉전종식 이후 가장 강도 높은 대 러시아 제재를 단행했다. 러시아 정부의 미국 ‘대선개입 해킹’행위에 맞서 외교ㆍ경제 분야가 망라된 공개 보복에 나선 것이다. 러시아 정부도 상응 조치를 예고, 미ㆍ러 사이의 ‘신 냉전’가능성 고조는 물론이고 사태 추이에 따라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외교 구상에도 차질이 예상된다.
오바마 대통령은 29일(현지시간) 대러 제재조치를 담은 긴급 행정명령을 발동했다. 백악관과 재무부도 ▦러시아 외교관 35명 추방 ▦미국 내 러시아 공관시설 폐쇄 ▦해킹 관련 기관ㆍ개인에 대한 경제제재를 발표했다. 또 구체 내용이 공개되지는 않았으나, 러시아에 타격을 입힐 비밀 작전도 전개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오바마 행정부의 전방위 제재 조치에 따라 워싱턴의 주미 러시아 대사관과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에 근무하는 35명 외교관이 가족과 함께 72시간 이내 미국을 떠나야 한다. 또 뉴욕과 메릴랜드 주의 러시아 정부 소유 시설 2곳도 폐쇄됐다. 해킹 배후로 지목된 러시아군 총정보국(GRU), 러시아연방보안국(FSB), 특별기술국(STG) 등 5개 기관과 이고르 발렌티노비치 국장을 포함한 GRU 최고위 인사 3명 등 러시아인 6명도 자산동결 등 경제 제재를 받게 됐다.
오바마 행정부의 제재는 러시아의 대선 해킹을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다. 앞서 미 중앙정보국(FBI)은 지난 7월 미국 민주당 전국위원회(DNC) 주요 인사들과 힐러리 클린턴 후보 캠프 존 포데스타 본부장의 이메일이 위키리크스에 폭로된 배후를 러시아 기관으로 지목했다. 미국 정부는 러시아 개입을 입증하기 위해 제재 조치 발표에 맞춰 해킹에 사용된 소프트웨어와 인터넷 주소도 이날 공개했다.
퇴임을 앞둔 오바마 대통령의 초강경 제재는 미국과 동맹국의 민주주의 수호라는 명분과 함께 차기 트럼프 정권의 대러 접근을 견제하려는 실리를 동시에 노린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휴가 중인 하와이에서 “러시아가 미국의 이익을 침해하려는 것에 대한 대응이며, 동맹국들도 러시아의 민주주의 개입 행위에 반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는 이날 행정명령에서 대러 제재 명분을 ‘미국 선거시스템에 대한 해킹’이 아닌 ‘자유세계 선거시스템에 대한 공격’으로 규정했다.
미국 정부 발표 직후, 러시아 정부는 강경 입장을 밝혔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러시아 대통령 대변인이 나서 “상응하는 보복 조치 이외에 대안은 없다”고 밝혔다. 최종 결정은 푸틴 대통령이 내릴 것이라고 선을 그었지만, 미ㆍ러 대립 사례를 감안하면 추방된 외교관 숫자에 상응하는 미국 외교관을 쫓아내는 방안이 취해질 수 있다.
이에 따라 미국의 정권이양 시기 미ㆍ러 관계는 단기적 경색이 불가피해졌다. 워싱턴 관계자는 “미ㆍ러 갈등이 높아진다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의 화해를 모색 중인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 전략에도 차질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많은 전문가들은 러시아 정부가 다가올 트럼프 행정부와의 관계를 의식해 실제 강경 대응에 나설 가능성은 낮다는 입장이다. 러시아 내부에서도 이번 조치를 ‘오바마의 의미 없는 마지막 몸부림’ 정도로 치부하는 목소리가 감지된다. 러시아 연방 하원(두마)의 레오니드 슬루츠키 외교위원장은 “오바마의 조치가 미ㆍ러 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미국의 보복 조치가 미ㆍ러관계 혹은 세계정세에 미칠 구체적 파장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 손에 달렸다는 평가가 많다. 정권 교체 일정(내년 1월20일)상 푸틴 대통령이 보복 조치를 취한다면 그 시점의 미국측 상대방은 오바마가 아닌 트럼프 대통령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바마 대통령 조치가 ‘행정명령’이기 때문에 차기 대통령이 마음만 먹으면 즉각 무효화시킬 수 있다.
트럼프 당선인의 친러 정책 또한 적잖은 변수다. 트럼프 당선인은 오바마 대통령의 조치가 발표된 뒤 내놓은 성명에서 “미국이 더 크고 더 좋은 일로 넘어가야 할 때”라며 오바마 행정부의 제재조치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는 전날 기자들의 질문에도 ‘이제 우리 삶을 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미국 언론은 오바마 대통령이 상세한 증거를 제시한데다가, 공화당을 비롯한 미 의회도 강경 분위기인 점에 주목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가 오바마 결정을 뒤집으려면 정보 당국이 (러시아의 해킹과 관련해) 찾아낸 것들을 부인해야 하는데, 쉽지 않은 일”이라고 예상했다. 같은 공화당이지만 트럼프와 악연이 깊은 존 매케인(애리조나), 린지 그레이엄(사우스캐롤라이나) 상원의원 등이 러시아 해킹 의혹을 끝까지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트럼프 당선인에게는 부담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트럼프의 대 러시아 접근을 견제하려 했다면, 제대로 정곡을 찌른 셈이다.
워싱턴=조철환 특파원 chch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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