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ㆍ인정 교과서도 한계
조선 후기 신분제 내용 등
14종 차별성 거의 안 보여
일부 학회 “자유발행제 도입”
교육 현장의 한 축인 교사들이 역사 교과서와 역사 교육의 미래를 논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서울시교육청이 28일 시교육청 강당에서 ‘서울 역사 교사 대토론회-역사 교육의 새로운 미래 열기’라는 주제로 연 토론회 자리다. 전날 정부는 역사 국정교과서 전면 적용을 1년 유예하고 국ㆍ검정교과서 혼용 방침을 발표했다.
사실상 토론보다는 토의에 가까운 자리였다. 찬성자가 부재했던 탓이다. 토론회가 열리기 전 진행한 사전 설문조사에서도 국정교과서를 반대한다고 답한 교사가 응답자(113명) 중 94.7%에 달했다. 교육부가 발표한 국ㆍ검정교과서 혼용 방침에 대해서 불만을 드러낸 의견도 86.7%였다.
국정교과서 시스템 자체가 과거지향적이라는 점에는 어렵지 않게 의견이 모아졌다. 교사들은 무엇보다 학생들이 배워야 할 교과서가 정권마다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쓸리는 일에 대한 염증을 호소했다. 조왕호 대일고 교사는 “2003년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집필, 2004년 금성교과서 파동 이후부터 이어져온 문제”라며 “교과서 문제가 교육 논리가 아닌 정치 논리에 끌려 다닌 지 10년이 넘었다”고 지적했다. 김홍규 우신고 교사는 “외부의 영향력 때문에 교사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수업을 하지 못해왔다”며 “국정교과서를 쓰면 교사들은 교과서를 선택할 권리조차 갖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국정이 아닌 검ㆍ인정교과서는 완벽한 대안일까
그러나 이 자리에서 국정교과서가 잘못됐다면 대안은 무엇이냐에 대한 뾰족한 해법은 제시되지 않았다. 국정교과서도 ‘제9의 검정교과서’로 경쟁하게 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주장은 ‘어떻게 국정교과서를 폐기할 것이냐’와 ‘학교 현장의 자율성을 어떻게 지킬 것이냐’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학계에서는 이미 보다 열린 제안들이 오가고 있다. 국정이냐 아니면 검ㆍ인정이냐 여론이 양분화된 상황에서 ‘국정교과서가 옳지 못하면 검정교과서는 완벽한 대안이냐’는 반문도 제기되고 있다. 고려대 역사교육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한 홍선이씨는 지난 3월 학술지 ‘역사교육’에 실은 ‘한국사 교과서 조선 후기 신분제 내용의 획일과 고착’라는 논문에서 “2011년과 2014년 발행된 검정교과서 14종 중 상당수가 과거 국정교과서의 내용을 답습하고 있으며 그 결과 서술 내용의 차별성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며 “국정제의 부당함과는 별개로 다원적 관점에 입각한 다양한 교과서 제작이라는 검정제 도입 취지가 현 검정 교과서에 얼마나 충실히 구현됐는가에 대한 냉철한 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김종준 청주교대 사회과교육과 조교수는 지난 2월 학술지 ‘역사교육연구’에서자유발행제가 역사 교과서 발행의 가장 발전적 모습임을 주장한 한국사역사연구회 편지내용을 공개했다. 이 편지는 지난해 정부가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방침을 결정한 직후 한국사역사연구회가 회원들에게 보낸 것이다. 편지에는 “현 정권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기도는 역설적으로 역사 교과서 단일화가 아니라, 자유발행제라는 역사교육의 민주적 이상의 실현을 앞당기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김육훈 독산고 교사는 지난 8월 학술지 ‘역사와 교육’에 게재한 ‘국정화 논란을 넘어 대화와 토론이 있는 수업으로’라는 글에서 “국가와 민족을 단위로 한 역사 서술 외에도, 지방사ㆍ동아시아사ㆍ세계사도 가능하며, 여성사ㆍ노동자 역사ㆍ어린이 역사 같은 특정 집단의 역사, 개인의 역사도 가능하다”고 최신 역사 연구 성과를 반영한 역사 교과서 발행을 제안했다.
교사들이 말하는 ‘올바른’역사 교과서는
실제로 토론회에 참석한 교사들의 바람은 위에 소개한 의견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전 주관식 설문응답을 통해 교사들이 원하는 역사 교과서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선생님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역사교육이란 어떤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교사들은 ‘민주시민에게 어울리는 역사 의식을 키워주는 교육’,‘열린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을 키우는 일’,‘역사를 통해 다양한 삶을 만나고 자신의 삶을 설계하도록 한다’ 등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다. ‘검ㆍ인정교과서라는 한계를 넘어 자유발행까지 나아가 교사가 자유롭게 교재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구체적 제안도 나왔다.
하일식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우선 검정교과서 체제로 돌아간 뒤 권력의 입김이 교과서 내용을 좌우할 수 없도록 제도를 다져야 한다”며 “그 후 국가와 민족만을 강조해 온 내용에서 탈피해 한국사를 통해 인권과 공정 등 보편적 가치를 함양하는 교과서를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앞서 2002년 전국역사교사 모임에서 펴낸 ‘청소년을 위한 대안교과서-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에서 저자들은 “결론만 제시되는 닫힌 교과서는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수많은 학생과 교사들이 자유롭게 만나 자신만의 결론을 만들어가는 그런 교과서를 꿈꿔왔다(발간사)’고 밝혔다. 이 발간사는 교사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역사 교과서의 모습을 함축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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