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끊임없이 가공되고 윤색된다
역사도 수시로 새로운 잣대로 씌어져
세계적 조류 판단은 한참 더 지나야
벌써 또 세밑이다. 한 해가 휙 지나간 듯하지만 돌이키면 꽤 길었다. 많은 일이 있었다. 최순실 사태와 촛불집회, 탄핵정국이 다른 것을 덮었을 뿐이다. 부정청탁방지법(김영란법) 시행, 북한 핵 및 장거리 미사일 발사 시험, 고고도미사일방어체제(사드) 배치, 규모 5.8의 경주 강진, 현직 검사장 구속을 부른 법조 비리 등이 잇따랐다.
인간의 기억이란 묘하다. 누구나 온전한 기억이라고 믿지만 대개는 끊임없이 닳고 탈색되고, 윤색되고 가공된다. 그 결과 똑같은 사건이라도 사람에 따라 기억이 다르다. 오래된 기억일수록 더하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옛 얘기를 하다 보면 너무도 다른 기억에 서로 얼굴을 보고 놀란다. 사건이 일어날 당시에 같은 처지여서 비슷한 눈길로 보았다면 기억도 비슷하지만, 처지가 달랐다면 내용이 완전히 다르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羅生門)’이 일깨워 준 그대로다.
뇌의 이런 작용은 일종의 방어기제다. 아프고 어두운 기억을 지우거나 묻어 최대한 스스로를 행복한 상태에 두려는 방책이다. 면역반응처럼 사람마다 정도가 다르다. 어떤 사람은 평생 암울한 기억에 시달리지만, 어떤 사람은 집단 트라우마조차 이내 떨친다. 체질이고 성격인 셈이고, 흔히 타고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노력을 통해 적잖이 바꿀 수도 있다.
기억의 집합인 역사도 마찬가지다. ‘조선왕조실록’ 등에 뚜렷이 기록으로 남은 역사조차 수시로 달리 해석된다. 정조가 어떤 때는 개혁군주였다가 어떤 때는 복고주의자다. 연산군이나 광해군도 때때로 폭군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지나간 역사에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가르침을 얻으려는 인간의 노력이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사기’나 ‘맹자’ 등 동양고전뿐만 아니라 ‘군주론’ 등 서양고전도 으레 옛일을 들어 지혜로 삼는 것을 보면, 동서고금에 통하는 인간 본성이라고도 할 만하다.
기억과 역사의 이런 허점은 개인과 세상의 커다란 딜레마다. 개인이나 집단의 가치와 신념의 뿌리를 파고들어 가면 결국 기억이나 역사라는 암반과 만난다. 그 기억과 역사가 온전한 것이 아니라면, 그에 터잡은 삶과 세상의 변화 또한 얼마나 허망한가.
물론 이런 허점을 피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기억의 허점이 ‘선택적 저장(Selective Retention)’의 결과라면 이론상으로는 새로운 사상(事象)을 만날 때마다 섣불리 판단하는 대신 판단중지(Epoche) 상태를 가지면 된다. 또는 ‘중용’의 가르침대로 희로애락에 흔들리지 않는 ‘중(中)’의 자세를 가져도 된다. 목석이 아닌 인간에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반복적 노력으로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설 수는 있다. 특별히 집단 기억인 역사 인식에서는 상당한 통제력을 가질 법하다.
올해 나라 안팎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었다. 안에서는 4ㆍ13 총선에서 애초의 예상과 달리 분열한 야당이 압승을 거두었고, ‘촛불혁명’이라고 불릴 정도로 거대한 민심의 분출이 있었다. 밖으로는 영국의 EU 탈퇴(브렉시트) 국민투표나 미국 대선이 상식적 추론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보였다. 안팎으로 무언가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음이 분명한 데도 동시에 그 방향성을 포착하기 어려워 혼란스럽다.
안에서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가치가 되살아나 근대 계몽사상 이래 인간 이성의 지향성을 뚜렷이 했지만, 밖에서는 유색인종과 이민자, 여성 등 사회적 소수파에 대한 배려를 확대해 온 성과를 뒤집었다. 도널드 트럼프의 승리가 ‘샌더스 돌풍’이나 2011년 ‘월 스트리트 점령’ 등의 반작용이라는 해석은 더욱 아리송하다. 민주주의의 치명적 약점인 중우정치의 일시적 현상이라고 치면 마음 편할지 모른다. 하지만 신ㆍ구 대륙에서 동시에 일어났고, 아시아에서도 그 싹이 보이니 결코 간단하지 않다. 더욱이 영미 양국은 근대 이래 세상 변화를 이끌어 왔다. 판단을 중지하고 좀더 지켜봐야만 한다.
새해까지도 불확실하니, 을씨년스러운 세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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