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결과’가 공개됐을 때 창비 출판사는 비로소 안도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건 이후 유족 목소리를 책으로 묶어낸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냈다. 그 후 세종도서 선정 사업에서 줄줄이 떨어졌다. 출판계에선 “세월호 문제를 다뤘다는 이유로 표적이 됐다”는 말이 돌았다. 진흥원은 “근거없다”고 펄쩍 뛰었지만, 블랙리스트 파문이 터진 뒤인 올해엔 선정작이 대폭 늘었다. 심지어 ‘4ㆍ16 세월호 참사 작가 기록단’이 쓴 ‘다시 봄이 올 거예요’까지 선정됐다.
#2014~2015년만의 문제도 아니다. 임지현 서강대 교수는 올 여름 불쾌한 기억이 있다. ‘인문주간’ 행사를 준비 중이던 한국연구재단으로부터 기조강연을 부탁해왔다가 나중에 번복됐다. 무슨 결례인가 싶었는데, 나중에야 전해 들은 바로는 지난해 ‘국정역사교과서 반대 서명’에 서명한 일이 최종 결제 단계에서 문제가 됐다고 한다. 임 교수는 “나야 해도 그 뿐, 안 해도 그뿐인 기조강연이지만 역사를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다 했던 서명 하나 때문에 30만원짜리 기조연설 하나 재단 마음대로 못 정하나 싶어서 한참을 웃었다”고 말했다.
정부비판 성향의 문화계 인사들을 집중 관리했다는 ‘블랙리스트’에 대한 이런저런 증언들은 차고도 넘친다. 공연 예술쪽 뿐 아니라 문학계, 출판계, 학계 등 전방위적이다. 심지어 문화체육관광부와 그 산하기관ㆍ단체 직원들까지도 사석에서는 “2014년 세월호 이후 정말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다”는 얘기를 공공연하게 하기도 한다. 블랙리스트를 앞세운 청와대의 강력한 압박을 받아내느라 내부적으로 무척 잡음이 많았다는 얘기다.
대형폭로도 나왔다. 유진룡 전 문체부 장관은 지난 26일 CBS라디오방송에 출연해 ‘김기춘 전 비서실장 – 정무수석실 – 모철민 전 교육문화수석 – 김소영 전 문화체육비서관’을 아예 ‘블랙리스트 라인’으로 지목했다. 앞서 공개된 김영한 전 청와대 정무수석의 비망록에도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이후 김기춘 전 실장이 ‘문화예술계의 좌파 책동에 투쟁적으로 대응하라’는 지침을 내렸다는 내용이 나왔다.
실제 세월호 시국선언, 문재인 후보 지지선언, 박원순 후보 지지선언 등에 참여한 이들을 총망라한 9,473명의 리스트(한국일보 10월 12일자 1면 보도)까지 만들어지기도 했다. 9,473명 리스트 공개 당시 문체부와 새누리당 의원들은 이 리스트에 오른 이들이 지원받은 게 600건이나 된다고 반박했지만, 이런 전후 맥락을 따져보면 “쉰들러가 유태인을 구했다고 아우슈비츠가 없는 건 아니다”라는 유 전 장관의 발언이 더 정확하다.
이 때문에 실질적인 블랙리스트는 문체부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청와대는 블랙리스트를 가동하려 해도 문화예술계를 잘 모른다. 청와대가 엉성해보이지만 대략적인 리스트를 뽑아 ‘이런 사람들을 반정부로 분류하라’라고 제시하면, 구체적 내역은 문체부가 채워넣는 방식이다. 문체부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SBS가 이번에 공개한 블랙리스트 문건을 보면 다른 리스트들과 달리 예술정책과나 공연전통예술과 등 실무부서에서 관여한 구체적 프로그램 이름들이 보인다”고 지적했다.
김 전 실장, 정무수석을 지낸 조윤선 문체부장관, 신동철 전 정무비서관, 정관주 전 국민소통비서관, 모철민ㆍ김상률 전 청와대 교문수석, 김소영 전 문체비서관 등을 잇따라 조사하고 있는 박영수 특검팀이 블랙리스트를 밝혀낼 수 있을 지 주목된다.
조태성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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