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적 명예시민혁명으로 자리 잡아가는 촛불집회의 에너지는 분노다. 양극화와 불평등 심화, 취업난 등으로 벌써 우리 사회의 분노는 위험 수위에 다다랐다. 여기에 박근혜 최순실 국정농단이 더해져 포도송이처럼 꽉 찬 분노가 사람들을 끊임없이 광장으로 불러내고 있다. 하지만 폭력적으로 분출하지 않고 평화적 축제 분위기를 이어 간다. 참여하되 절제가 있다. 백만 인파의 집회가 만들어 내는 이 현상을 세계가 경이로운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다.
▦ 성숙한 시민의식의 발로라고만 하기에는 부족하다. 집회에 참석한 이들은 금방 안다. 해학과 풍자가 분노의 폭발적 분출을 제어한다는 것을. 기발한 팻말이나 구호에 함께 웃으면서 연대감을 키운다. 집회ㆍ시위는 더 이상 운동권이나 과격 단체의 전유물이 아니다. 평범한 일반 시민들도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는 축제의 장이 되었다. 국민의 요구인 박근혜 대통령 퇴진 또는 하야는 풍자의 소재로 무궁무진하게 변주됐다.‘박근혜씨 집에 가소’. 농민이 집회장에 끌고 온 소의 등에 덮인 천에 쓰인 글귀다. 5차 촛불집회 날 내린 올해 첫눈은 ‘하야~ㄴ 첫눈’이었다.
▦ ‘하야 하그라’. 청와대가 발기부전 치료제인 비아그라를 예산으로 대량 구매한 사실이 드러난 직후 등장한 패러디 깃발이다.‘한국 고산지 발기부전 연구회’라는 단체 명의다. 비아그라 구매가 고산지대 국가 방문용이라는 청와대 해명을 비틀었다. ‘근혜님은 청와대를 비우그라’라는 구호도 등장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였던 24일 오후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9차 촛불집회 때는 ‘하야 크리스마스 콘서트’가 열렸다. “촛불 이겨서 하야 한다면 흥겨워서 소리 높여 노래 부를래” 등 캐럴 가사 바꿔 부르기가 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모여든 참석자들의 흥을 돋웠다.
▦ 올해의 마지막인 31일 열리는 10차 촛불집회는 송박영신(送朴迎新)을 핵심 구호로 내세웠다. 옛것을 보내고 새것을 맞는다는‘송구영신’(送舊迎新)의 패러디다. ‘박근혜’는 정말 이제는 떠나 보내고 잊고 싶은 지긋지긋한 옛 것이 되었다. 2017년 새해는 정유(丁酉)년 닭의 해다. 박 대통령에 비유되고 AI로 사상 유례없는 살처분으로 수난을 당한 닭들에게도 올해는 빨리 잊고 싶은 지긋지긋한 한 해일 터이다. 양력설은 어렵지만 어쩌면 음력설 즈음에는 송박영신의 소망이 이뤄질지도 모르겠다.
이계성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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