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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영혼의 살인자, 블랙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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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영혼의 살인자, 블랙리스트

입력
2016.12.2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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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자 배제와 탄압에 그치지 않고

다수를 입 닫게 하는 ‘위축효과’도

중대 범죄의 실체 낱낱이 밝혀야

청와대 국민소통비서관 재직 당시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에 관여한 의혹을 받는 정관주 전 문화체육관광부 1차관이 27일 특검 사무실에 참고인 신분으로 출석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ssshin@hankookilbo.com
청와대 국민소통비서관 재직 당시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에 관여한 의혹을 받는 정관주 전 문화체육관광부 1차관이 27일 특검 사무실에 참고인 신분으로 출석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ssshin@hankookilbo.com

요즘 베개 밑에 두고 찬찬히 읽는 책이 있다. 영국 역사학자 시어도어 젤딘의 ‘인생의 발견’(어크로스 발행)이다. 저자가 동서고금을 넘나들며 풀어 내는 넓고도 깊은 사유와 통찰의 경지보다 더 와 닿은 건 ‘보통사람들을 위한 역사가’로 불리는 그의 화법이다. 젤딘은 개인의 삶과 관계, 빈부, 예술, 국가, 종교 등을 아우르는 28개의 질문을 던지고 그에 답하기 위해 역사 속의 숱한 인물들을 불러낸다. “한 사람의 경험, 한 시대의 지식만으로는 인생이 가진 의미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팔순의 노학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번잡한 세상사에 지친 마음을 위로받고 때론 묵직한 메시지에 심장이 뛰기도 한다. 이를 테면 이런 구절. “세포는 주변의 다른 세포들과 신호를 주고받지 못할 때 자살 기능을 발동시킨다. 그리고 다른 세포들과 결합해서 자기보다 더 큰 무언가를 만들 때 살아남는다. (중략) 남들이 내게 두려움을 불어넣고 내가 그들에게 말을 건넬 방법을 모르거나 그들이 내게 말을 건넬 방법을 모르거나 우리가 서로의 요구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존재의 목적을 상실한 세포와 같다.”

책의 원제는 ‘삶의 숨겨진 기쁨들(The Hidden Pleasures of Life)’이다. 저자는 그 기쁨들을 찾아 온전하고 가치 있는 삶에 이르는 길로 타자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제안한다. 그의 말을 옮기자면 “살아 있다는 것은 심장이 뛰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심장은 어떻게 뛰고 다른 정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아채는 일”이다.

목전의 현실에 대입해 보자. 우리 사회가 이토록 지독한 독선과 폭주, 분노와 증오로 들끓게 된 건, 다른 심장과 다른 정신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못했기 때문 아닐까. 아니, 알려고 애쓰기는커녕 그런 노력의 싹조차 무참히 짓밟고 사회 곳곳에 높고 단단한 벽을 쌓아 왔다고 말해야 옳겠다. 권력자들, 혈세 먹는 공복들, 그 주변에 빌붙은 장사치 학자와 언론인들이 그런 ‘정신의 경직’을 부추기는 데 앞장서 왔다는 게 이 비극의 뿌리다.

박근혜와 비선실세, 충실한 조력자들이 저지른 악행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다. 그중 내가 가장 용서할 수 없는 범죄는 숱한 이들의 심장과 정신을 옥죄고 갉아먹은 블랙리스트의 남발이다. 이 정권이 제 입맛대로 만들어 뿌리고 활용한 ‘검은 명단’에는 소수의 반 정권 인사만 오른 게 아니다. 문화예술계만도 수천 명에 달해 “내 이름은 왜 없느냐”는 항변과 “이름을 넣어 줘 고맙다”는 인사가 우스개처럼 나도는 지경이다.

블랙리스트의 폐해는 명단에 오른 이들에 대한 배제와 탄압에 그치지 않는다. 실체 없는 유령처럼 떠돌며 불안과 공포를 부추겨 모두들 스스로 입을 닫고 몸조심을 하게 만든다. 이른바 위축 효과(Chilling Effect)다. 블랙리스트를 ‘영혼의 살인자’라고 일컫는 이유다. 블랙리스트는 전염성도 강하다. 지난 정권 이래 정부기관과 언론사를 비롯해 사회 각 분야의 권력자들이 제 조직을 손쉽게 통제할 수단으로 이를 적극 활용해 왔다.

공정보도를 외치고 낙하산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다 해고되고 징계받은 기자, PD들이 법원의 승소 판결에도 불구하고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파헤치는 데 언론의 경쟁적 보도가 큰 몫을 했다지만, 숱한 언론인들이 애당초 펜을 빼앗기지 않았다면, 전염된 불안과 공포가 언론계를 뒤덮지 않았다면, 우리 사회가 치러야 할 대가가 조금은 줄지 않았을까.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유포하고 활용하는 모든 행위는 명백한 범죄다. 단지 법정에서 심판 받아야 할 범죄를 넘어 인간다운 삶, 아이들이 살아갈 나라의 미래, 나아가 역사를 망가뜨리는 중대 범죄다. 특검 수사를 통해 그 실체가 낱낱이 밝혀지기를 바란다. 잇속은 다 차리고 모르쇠로 버티는 범죄자들이 다시는 권력을 잡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심장과 다른 정신의 소리를 알아챌 수 있는 사회를 꿈꿀 수 있다.

이희정 디지털부문장 jay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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