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도 첫 날, 흐린 하늘의 부슬비는 을씨년스러웠다. 공기는 따뜻했지만, 바람 섞인 빗방울은 이제 막 발을 디딘 이의 마음을 우울하게 하기 충분했다. 점심을 걸러 배가 고픈 채로 해질녘의 낯선 도시를 걷기 시작했다.
시간이 많이 묻은 거리를 걷다 보니 시장이 보였다. 들어가면 간단한 요기거리라도 보일 것 같아 좁다란 골목 안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순대. 분식점 비닐순대가 아니라, 진짜 돼지창자에 선지와 찹쌀범벅이 그득한 그런 순대였다. 바로 저거다. 식당으로 들어가 순대국밥과 한라산 소주 한 병을 시켰다. 가슴 속까지 뜨거워지는 국밥 한 숟가락과 처음 마셔보는 한라산 소주 한 잔은 이제 막 발을 들인 외지인의 쓸쓸함을 달래주기 충분했다. 말없이 혼자 먹는 이의 굽은 어깨에서 무안함을 덜어줬다.
이후에도 종종 동문시장의 그곳에 들렀다. 요즘같이 날이 추워질 때면 유독 생각이 났다. 커다란 솥단지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주인할머니는 밥이 담긴 그릇을 솥 끄트머리에 대고 능숙한 손길로 토렴을 한다. 그 위에 순대와 머리고기, 두어가지 양념이 올라간다. 작지만 그득한 한 그릇은 투박하고 거칠다. 다대기 조금 얹어 넘칠듯한 국물을 조심스레 뒤집은 후 정갈하지 않은 한 술을 떠 입에 넣는다. 거칠고 투박한 한 숟가락에 편안하고 든든해진다. 순대국밥 한 그릇에 담긴 묘한 매력이다.
든든해지는 속만큼 힘이 난다. 그것은 단순히 배고픔을 해결하는 일을 넘어 앞으로 주어진 일들에 대한 자신감이다. 국밥 한 그릇에 채워지는 자신감은 평등하다. 그래서일까. 오래 전 대선 후보로 나선 이의 선거광고는 국밥을 말아먹는 장면이었다. 국밥은 그렇게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한 그릇만큼의 자신감을 부여한다.
동문시장에 들어서면 광명식당을 찾는다. 순대국밥 한 그릇에 이 섬에 디딘 발이 편안한 자신감을 얻었을 때부터 알게 된 식당이다. 그곳만의 찰지고 그득한 순대는 막걸리 한 잔을 곁들이지 않으면 안될 것만 같고, 진한 돼지육수에 담긴 밥과 순대는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보약 같다’. 투박하고 거친 동시에 묵직한 깊이를 느낄 수 있는 국밥 한 그릇은 개인적으론 제주 먹거리 중 제일이다. 블로그의 첫 맛집으로 꼽았던 이유다.
그날처럼 쌀쌀함이 마음을 움츠리게 하던 날, 장인을 모시고 광명식당을 다시 찾았다. 시간이 흘러 가격이 오르고 소소한 변화도 생겼지만, 능숙하게 토렴해내는 주인할머니는 여전했다. 순대 한 접시, 막걸리 한 병과 함께 국밥 한 그릇을 비웠다. 맛도 그대로, 차오르는 든든함도 그대로였다. 한겨울을 앞둔 마음과 올해를 보내는 마음을 다잡아본다. 서서히 쌓이는 시간의 무게에 움츠렸던 어깨도 조금 펴 본다. 내겐 제주의 시작이었던 그 곳에서 여전히 힘을 얻어 나올 수 있음에 감사하다.
전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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