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학폭위 징계 재심 청구 급증
“생기부에 기록되면 미래 망친다”
작은 다툼까지 법정으로 끌고가
2.“생기부 기재 훈령 재검토해야”
상급학교서도 처분 적용 검토 중
“경미한 사안 기재 않도록 보완을”
“내 XX 보여 줄 테니까 네 XX 보여줘.”
서울 한 중학교 3학년 A군은 지난 4~6월 같은 학교 여학생들에게 수 차례에 걸쳐 성적 수치심을 불러 일으키는 음란 메시지와 영상을 보냈다. 이를 본 교사들은 곧바로 교내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학폭위)에 회부했다. 결과는 전학 및 출석정지 처분. 피해 학생들과 격리가 필요하고, 화해가 이뤄지지 않은 점 등이 고려됐다. A군은 오히려 메시지 전송자가 자신임이 밝혀져 명예가 훼손됐다며 피해 학생들을 학폭위에 회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학교 처분에도 불구하고 A군은 줄곧 학교를 다니다가 내년 2월 정상 졸업할 예정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학폭위 결정을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은 소송을 악용했기 때문이다. A군의 부모는 학교 처분이 부당하다며 행정소송을 냈고 1심에서 지자 항소했다. 전학 같은 무거운 처분은 최종 판결이 날 때까지 법원이 집행정지를 받아준다는 점을 노렸다. 2심에서 서울고법 행정4부(부장 조경란)는 학교 처분이 정당하다고 지난 20일 선고를 내렸다. 하지만 이미 학기는 마무리됐고 전학처분은 때를 놓쳤다.
학폭위 처분을 늦추거나 막아보려는 학부모들이 이처럼 소송을 남발하고 있다. 교육부 집계 결과 가해 학생이 학폭위 결정에 불복해 교육청 징계조정위원회에 재심을 청구한 건수는 2012년 305건에서 2015년 408건으로 33.8%가 늘었다.
사소한 다툼마저 법정 분쟁으로 치닫긴 매한가지다. 서울행정법원 제5부(부장 강석규)는 지난 15일 서울의 한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이 학교의 ‘서면 사과 및 교내 봉사 3일’ 처분이 부당하다고 낸 행정소송을 기각했다. 이 학생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서로 험담하며 티격태격하던 친구 앞에서 상대의 자살을 암시하는 ‘자살송’을 여러 차례 불러 학폭위에 회부됐었다.
전문가와 교사들은 학폭위 처분결과를 학생생활기록부(생기부)에 기재하도록 한 현행 교육부 훈령이 이 같은 부작용을 낳고 있다고 지적한다. 노희창 배재고 교사는 “생기부를 중요하게 보는 학생부종합전형이 한 해 대입 모집인원의 70%에 육박하는 상황이라, 가해 학생 잘못이 명백해도 처분을 순순히 인정하지 않고 어떻게든 생기부 기록을 피하려 한다”며 “소송을 하거나, 학교 모르게 학부모들끼리 만나 합의를 보려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손영실 변호사(민변 교육청소년위원회)는 “졸업하면 생기부 기록을 지워주지만 대입, 특목고나 국제중 입시는 모두 학기 중에 원서를 낸다”며 “‘잘못을 인정하면 인생 망친다’는 생각에 달려드는 학부모들이 많다”고 지적했다.
소송을 부르는 훈령이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조영선 영등포여고 교사는 “법적 소송을 감당할 여력이 되는 가해 학생들만 교묘히 처분을 피해가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며 “똑같은 잘못을 해도 누구는 학교 처분과 입시 불이익이라는 이중처벌을 받고 누구는 법적 조력을 받아 빠져나갈 수 있는 제도는 교육적이지 않다”고 비판했다.
교육부는 재심 청구나 법적 소송 등으로 처분이 지연되는 사이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경우 상급학교에서 미뤄진 처분을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그러나 학교 현장에서는 생기부 기재 훈령부터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이 고조되고 있다. 전수민 서울시교육청 학교폭력 전담 변호사는 “당장 생기부 기재 훈령을 없애기 어렵다면 경미한 사안은 기재하지 않도록 하는 등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민정 기자 fac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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