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열흘 붉은 꽃은 없다. 스포츠 세계도 마찬가지다. 잘 나가던 스타가 한 순간에 무대 뒤편으로 사라지는가 하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선수가 일약 스타덤에 올라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한다. 특히 올해는 남미 최초의 올림픽이 열린 리우에서 수많은 별들이 새롭게 조명 받았다. 2016년 명암을 달리한 ‘뜬 별’과 ‘진 별’을 소개한다.
뜬 별
한국 양궁은 8월 리우올림픽에서 사상 최초 남녀 전 종목 석권(남녀 개인전ㆍ남녀 단체전)이라는 찬란한 업적을 쌓았다. 특히 여자 양궁 개인전과 단체전을 휩쓸어 2관왕을 차지한 장혜진(29)은 ‘대기만성형’ 스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양궁을 시작해 27세이던 2014년 양궁월드컵에서 첫 개인전 금메달을 딸 정도로 뒤늦게 꽃을 피웠다. 2012년 런던올림픽 최종 선발전에서 4위에 그쳐 3명이 나가는 올림픽에 못 간 아픔도 겪었던 그는 처음 출전한 올림픽에서 한국 여자 양궁의 ‘신궁 계보’를 이어갔다.
남자 펜싱 박상영(21)은 ‘할 수 있다’신드롬을 불러왔다. 그는 에페 개인 결승에서 제자 임레(42ㆍ헝가리)에 10-14로 뒤지다 5점을 내리 얻어 극적인 역전드라마를 완성했다. 모두가 경기를 포기했을 때 그가 혼잣말로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장면이 중계화면에 잡혀 올림픽 최고의 명언으로 회자됐다.
인종차별로 흑인의 접근이 제한됐던 종목에서 흑인 여성 두 명이 금메달을 따 큰 화제를 모았다.
주인공은 미국 기계체조 국가대표 시몬 바일스(19)와 여자수영 자유형 100m 금메달리스트 시몬 마누엘(20)이다.
바일스는 평균대에서 미끄러지는 실수를 범해 동메달에 그쳐 전인미답의 5관왕 등극은 놓쳤지만 단체전과 개인종합 금메달, 도마에 이어 마루 종목을 싹쓸이했다. 여성 기계체조는 1928년부터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됐지만 흑인들이 이 종목에 출전하기 시작한 건 최근의 일이다. 2013년 바일스가 벨기에 세계선수권 개인종합에서 흑인 최초로 우승을 거머쥐자 경쟁자였던 이탈리아 선수는 “다음에는 우리도 피부를 검게 칠하고 나오면 우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하지만 바일스가 올림픽에서도 빼어난 연기를 펼치자 그를 향한 비난은 사라졌다. 어머니가 알코올 및 마약중독에 빠져 3세 때부터 외할아버지 밑에서 자란 바일스의 불우한 어린 시절 이야기가 공개되면서 그의 도전은 미국 사회의 응원을 받고 있다.
마누엘도 올림픽 수영에서 흑인 여자 선수로는 처음 1위를 차지했다. 미국인들이 수영을 즐기기 시작한 건 1920년대부터이지만 이는 오로지 백인에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인종차별로 흑인들의 수영장 및 해변 출입이 제한됐고 1964년에는 흑인 출입 제한 철폐를 주장하며 수영장에서 시위를 한 흑인 민권운동가들에게 수영장 주인이 염산을 뿌린 적도 있다. 그 후 52년이 지나 마누엘은 물속에서 피부색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줬다.
‘셀카’ 한 장의 여운도 깊게 남았다.
체조 국가대표 이은주(17ㆍ강원체고)와 북한 홍은정(27)은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연습 도중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이를 두고 토마스 바흐(63)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은 “위대한 몸짓”이라고 표현했다. 미국 경제지 포브스는 “휴전 중인 두 나라 선수들의 모습에서 세계인은 하나가 되는 장면을 목격했다”며 리우올림픽 인상 깊은 6개 순간 중 하나로 선정했다.
중국 수영선수 푸위안후이(20)은 ‘대륙의 아이콘’이 됐다. 그는 여자 배영 100m에서 동메달을 받았다. 2위와는 0.01초 차이였다. 푸위안후이는 “은메달을 못 딴 건 손이 짧기 때문”이라고 웃으며 “동메달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미국 뉴욕매거진은 올림픽의 7가지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로 그의 활짝 웃는 모습을 뽑았다. 호주 시드니모닝헤럴드는 “동메달을 받고 수백 만 명의 팬을 거느리게 된 선수”라고 썼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태초의 소녀’를 통해 중국인들은 금메달 숭배에서 벗어나는 법을 배웠다”고 평했다. ‘태초의 소녀’는 푸위안후이가 여자 배영 100m에서 준결승에 진출한 뒤 “태초의 힘을 다 써버렸다”고 한 말에서 나온 것이다.
‘수영 황제’ 마이클 펠프스(31ㆍ미국)의 접영 100m 4연패를 가로막은 싱가포르 조셉 스쿨링(21)도 깜짝 스타로 떠올랐다. 스쿨링은 영국군 장교인 증조부와 포트투갈-유라시아계 증조모,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어머니까지 다양한 인종적 뿌리를 가져 더욱 눈길을 끌었다.
진 별
장대높이뛰기 세계신기록만 17차례 갈아치운‘미녀새’ 옐레나 이신바예바(34ㆍ러시아)는 자국이 도핑 파문에 휘말린 탓에 리우올림픽 출전이 좌절됐다. 강제 은퇴를 당한 그는 유승민(34)과 함께 IOC 선수위원으로 뽑히며 아쉬움을 달랬다. 일본 여자레슬링의 ‘살아 있는 전설’ 요시다 사오리(34)는 올림픽 4회 연속 우승의 문턱에서 주저앉았다. 요시다는 결승에서 체력 부담을 이겨내지 못했다. 자신의 시대가 막을 내렸음을 직감한 요시다는 한동안 매트에서 눈물을 흘렸다.
남자 배드민턴에서 올림픽 2연패를 이룬 린단(33·중국)은 결승에서 두 번 모두 꺾었던 리총웨이(34·말레이시아)를 리우에서는 넘어서지 못했다. ‘숙적’ 린단을 드디어 올림픽에서 꺾은 리총웨이는 그토록 바라던 금메달을 눈앞에 두고 정작 결승에서 세계 랭킹 2위 천룽(중국)에게 패해 또 한 번 무릎을 꿇었다.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거 강정호(29ㆍ피츠버그)는 올해 잇단 사고로 물의를 일으켜 팬들에게 큰 실망을 안겼다. 그는 지난해 당한 무릎 부상을 털고 메이저리그로 복귀해 타율 0.255, 21홈런, 62타점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경기장 밖에서는 6월 성폭행 사건에 휘말리고 시즌 후 음주 운전 사고를 냈다. 강정호는 2009년 8월 음주 단속에 적발됐고, 2011년 5월에는 이번과 마찬가지로 술을 마시고 물적 피해가 발생한 사고를 낸 적이 있어 ‘음주 운전 삼진아웃제’ 적용 대상이 됐다.
올해는 유독 많은 전설적인 스포츠 스타들이 세상을 떠나 팬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토털 사커(전원 공격 전원 수비)를 꽃피운 인물로 평가되는 요한 크루이프가 3월 24일 68세의 일기로 숨을 거뒀다. 폐암으로 운명을 달리 한 크루이프의 사망 소식에 전 세계 축구계가 앞 다퉈 애도를 표했다. 등번호 14번을 달고 네덜란드 대표팀과 프로 클럽을 누볐던 크루이프는 그렇게 ‘축구의 전설’로 팬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았다.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는 말을 남긴 20세기 최고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도 지난 6월 4일 74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12세 때 복싱에 입문한 알리는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라이트 헤비급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는 프로로 전향해 3차례에 걸쳐 헤비급 타이틀을 거머쥐고 통산 19차례 방어에 성공하면서 1960~70년대를 풍미했다.
그는 화려했던 성적과 함께 인종차별과 싸운 복서로도 기억된다. 알리는 미국 대표로 로마 올림픽에 출전해 금메달리스트로 금의환향했으나 흑인이라는 이유로 식당 출입을 저지당하자 방송을 통해 “나는 세계 챔피언인데도 내가 들어갈 수 없는 이웃집들이 있다”고 비판하는 등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 관행에 강하게 저항했다.
1967년에는 베트남 전쟁 징집 대상이었지만 알리는 “베트콩은 나를 깜둥이라고 부르지 않는데 내가 왜 총을 쏴야 하느냐”며 참전 거부를 선언했다. 결국 타이틀을 박탈당했고 프로복서 자격도 빼앗겼다. 3년여 법정공방 끝에 미국 대법원은 알리의 손을 들어줬고 그는 1970년 링에 복귀해 1974년 조지 포먼을 8회 KO로 물리치고 세계 챔피언에 복귀했다. ‘골프의 전설’ 아놀드 파머도 9월 26일 인생의 18번 홀을 ‘홀아웃’했다. 향년 87세. 파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골퍼 중 한 명으로 꼽힌다. 1955년 프로에 입문해 캐나다오픈을 시작으로 프로 통산 95승을 올렸다.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에선 총 62승을 쓸어 담았다. 특히 마스터스는 1958년부터 2년 간격으로 4차례나 제패했다. 메이저 대회에서는 통산 7번 정상에 섰다.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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