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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어둡다 한탄 말고 내 작은 촛불부터 밝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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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어둡다 한탄 말고 내 작은 촛불부터 밝히자”

입력
2016.12.22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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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장 유흥식 주교는 "세상이 어둡다고 아무리 한탄해도 어둠은 사라지지 않는다"며 "어둠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은 '어둡다'고 외칠 때가 아니라 나 자신이 작은 촛불을 밝힐 때"라고 강조했다. 대전=김혜영 기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장 유흥식 주교는 "세상이 어둡다고 아무리 한탄해도 어둠은 사라지지 않는다"며 "어둠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은 '어둡다'고 외칠 때가 아니라 나 자신이 작은 촛불을 밝힐 때"라고 강조했다. 대전=김혜영 기자

2016년 한국사회는 ‘정의와 평화의 상실’을 절감했다. 한일 간 일본군 위안부 문제 졸속협상 논란으로 한 해를 열었고, 백남기 농민 진단서를 놓고 외압 논란이 쏟아졌다. 무엇보다 최순실 게이트가 정국을 강타했다. 벌써 3주기를 향해 가지만 각종 세월호 의혹도 그대로다. 반성한 사람은 찾기 어려웠다. 굵직한 사건들로 몸서리쳤던 한국사회가 성탄의 축복을 만끽할 준비가 되지 않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 여느 때 같은 흥취는 시국 걱정과 깊은 시름이 대신했다.

22일 오전 대전 동구 대전교구청에서 만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장 유흥식(65) 주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용기, 증언, 양심의 소리가 중요한 시기”라며 “고통 받는 이들을 우선 사랑하며 고통을 양산하는 사회구조나 부정부패에 대해 고발하는 것이 곧 자비”라고 강조했다.

주교회의 산하 정의평화위원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사회 현실 속에서 시대의 상황이 필요로 하는 교회의 가르침을 전하는 기구다. 정의, 평화, 인권, 노동 현안과 관련해 일선에서 분투하는 약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가 하면, 세미나, 도서발간, 성명서 발표 등을 통해 사회교리를 강조한다. 자연히 자본과 권력에 대한 쓴 소리를 아끼기 어렵다.

-올 한 해 어떻게 지켜 보셨나요.

“참으로 무거운 마음입니다. 국민 모두와 연대하며 한치 앞으로 예상할 수 없는 정국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보고 있죠. 정치인들과 현안 관련자들에게 올바른 판단을 내릴 지혜와 용기를 주시기를 매일 기도해요. 국정농단 사태 이전까지의 상황도 좋진 않았죠. 돌아보면 정의평화위원회가 발표한 담화문 수가 그 어느 해보다 많았거든요. 결코 반가운 일은 아니죠. 백남기 형제를 하느님 품에 보내는 큰 슬픔도 겪었고요. 부디 내년에는 슬프고 허탈하고 분노하는 일이 이보다 적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왜 이리 각박해진다고 보시나요.

“전 세계적으로도 배려, 나눔의 정신은 설 자리를 잃어가는 게 현실이죠. 우리나라의 경우 개인주의, 물질주의, 성장주의 확산과 심화 속도가 그 어느 나라보다 심각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하는 사람들이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고, 민주주의 원칙을 뿌리부터 흔드는 정치 현실이 양심과 정의를 능멸하는듯한 현실은 참 통탄할 상황이에요. 이런 조류를 거슬러 사랑, 정의의 신앙을 고백하고 실천하는 건 순교자의 삶이나 다름없죠. 통계상 종교인 수가 급감한다고 하는데, 종교가 종교다움을 온전히 실현하지 못했기 때문에 맞는 현상이고 가톨릭교회와 모든 종교들이 반성해야 하는 일이라고 봐요.”

-정평위원장으로 활동한지 2년째시죠.

“역할을 다하려고 노력했지만 부족과 무능을 체험하는 기간이기도 했어요. 고통 받는 분들이 늘 기도의 첫 자리를 차지하긴 했지만 제 몸이 하나고, 봉직하는 교구 일도 많아 현장을 다 일일이 찾을 수 없는 게 안타까웠고요. 그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돕고 연대해준 감사한 분들 덕에 버텼네요. 정평위 입장이라는 게 주교회의나 가톨릭 교회의 입장으로 읽히기 때문에 고민도 많고, 독자적인 입장을 발표하기 보단 다양한 주교님들의 의견을 반영하려고 애썼어요. 회람도 열심히 돌리고요. 한번 성명을 내려면 ‘죽다 살았다’ 했다 해요. 그래도 고민 끝에 입장을 내고 나면, 교황청에서도 보시고 ‘한국주교들이 이렇게 정치, 경제, 사회 문제에 대해서 사목적, 영성적으로 길을 제시하는데 깊은 공감을 표한다, 그 뜻을 늘 지지하겠다’고 반응이 오기도 해요. 감사한 일이죠.”

-현장 방문도 많이 하셨잖아요.

“모든 현장의 목소리가 안타깝고 기억에 남아요. 팽목항과 분향소에서 뵀던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의 목소리도 그랬고, 백남기 형제 병상과 빈소를 지켰던 가족과 농민들의 목소리가 그랬고. 올해 1월 1일 찾아 뵀던 위안부 할머님들이 그랬고요.”

-약자들의 목소리는 우리 사회에서 갈수록 힘을 잃는 것만 같은데요.

“전 한국사회 양극화 심화, 중산층 붕괴가 깊은 관계를 가진다고 봐요. 급변하는 기술로 생기는 고용불안정, 정치경제적 불안정과 충격은 중산층과 빈곤층에게 고스란히 가해지죠. 부정부패로 성공하는 사람들을 보며 갖는 상실감이 타인에 대한 배려나, 정의실천을 무력화하기도 하고요. 약자배려를 약화시키고, 사회안전망은 무너지고, 가장 약한 사람들은 점점 다시 일어서가 어렵게 내몰리니까요.”

-그런 자리에 함께하는 성직자를 비판하는 의견들도 있는데요.

“사회교리의 정신을 공유하려는 우리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겠죠. 성직자들은 스스로가 복음을 이데올로기화하려는 유혹을 경계하면서 신자 공동체의 마음을 잘 헤아려 선포하는 지혜를 실천해야죠. 그러나 동시에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랑의 실천이잖아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 안에서 드러내는 것이 신앙의 실천이에요. 즉 인간 존엄성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은 사랑을 저해하는 요소고요. 교회가 세상 일에 관여하는 지점은 바로 여깁니다. 인간다움을 온전히 실현하는 세상을 여기 이곳에서 실현하는 것이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가 받은 소명이니까요.”

-소위 ‘정치적 발언 하지 마라’ 는 반응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서 ‘정치’란 단어가 금기시돼 온 것 같아요. 나와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과 진정 어린 대화를 하기 보단 반감을 가지고 공격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분단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죠. 동족상잔의 비극과 상처를 정치권이 앞장서 치유해야 하는데 오히려 이용하는 경우도 많았고요. 대표적 예가 ‘종북’ ‘빨갱이’란 표현이죠. 정부 정책의 문제를 지적하면 어김없이 ‘종북’ 굴레를 씌웁니다. 교회의 사회참여를 왜곡하는 현상도 이와 무관하지 않죠. 사회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것은 복음화라는 그리스도교 제일 소명을 실천하는 일이에요. 일부 비판과 의도적 왜곡에 굴복할 순 없죠. 물론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준다면 스스로 자세를 돌아보고, 이웃과 세상을 섬기는 더 낮은 자세로 임하고, 다른 교회 활동에서도 모순되지 않는 모습을 증거하기 위해 애써야겠지만요.”

-근래 가장 주되게 지적해 온 문제 중 세월호 진상규명은 아직도 요원합니다.

“사고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죠. 문제는 예방할 수 있었는지, 재발 방지 노력은 충실히 수행했는지, 방지를 위한 첫 단계로 사고 원인은 성실하고 분명히 규명했는지의 질문이 중요하잖아요. 이 세가지 질문 모두가 회피, 은폐되고 있어요. 국민 불안, 분노, 불신은 점점 커질 수 밖에 없죠. 우리는 생생한 장면을 눈으로 봤습니다. 현장 책임자와 정부가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큰 희생자가 난 것을 절대 부정할 수 없죠. 책임을 져야 하는데 자꾸 은폐만 하니 역사도, 사회도 발전하기 어려워요. 너무나 순진했던 어린 학생들이 그대로 수장됐잖아요. 우리 기성세대가 두고두고 용서를 청해야 할 죽음입니다. 그런데도 수사를 방해하고 드러난 사실을 은폐하니 통탄할 일이죠. 이웃나라에선 국가 원수가 ‘국민 하나의 생명은 전 지구의 무게와 같다’고 하잖아요. 세월호는 잘못된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최고 집권자의 그릇된 책임의식이 빚어낸 결과입니다. 다시 말해 구조변화와 책임규명이 되고 개선되지 않는다면 언제든 수백 번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에요. 부디 역사와 민족 앞에 부끄럽지 않은 결단과 참회의 자세를 이제라도 보여주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무엇 하나 규명이 잘 안되니 ‘헬-조선’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어쩌다가 그렇게 표현하는 지경에까지 왔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변화는 분명 가능할 뿐 아니라이미 시작된 것 같아요. 여러 차례에 걸친 평화적 촛불집회가 그 명확한 증거에요. 민주주의의 이상을 정확히 인식한 우리 모두가 한 마음으로 성숙한 변화의 움직임을 만들었잖아요. 우리 높은 교육수준과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민주주의를 지켜온 가운데 배운 경험이 함께 표출된 현상이라고 봤어요.”

-최근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 총회에서도 질문을 많이 받으셨다고요.

“11월 말에 참석했는데 각국 주교님들께서 일제히 한국 상황에 대해 궁금해하셨죠. 무엇보다 100만 넘는 시민이 모여 촛불집회를 하는데 방화가 없고, 약탈이 없고, 폭력이 없고, 쓰레기가 없다니, 정말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냐, 믿기 어렵다, 한국 시민들의 수준이 놀랍다는 반응이었어요. 이번 국정농단 사태가 이런 양극단의 절망과 희망을 모두 보여주고 있는 셈이죠. 돈 중심, 권력 중심, 이기주의의 민낯도 드러냈지만 전 세계가 놀랄만한 시민의 힘이 표출됐으니까요. 이런 비폭력, 평화의 자세는 계속 유지돼야 하고, 누구도 정치적 당리당략으로 이를 흩트리거나 왜곡해선 안될 일이에요. 또 현 사안에 관련된 모든 이들이 용기를 가지고 증언하며,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를 촉구하고 싶어요. 한 사람 한 사람의 용기와 증언이 역사를 바꾼다는 교훈을 잊어선 안돼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내년 ‘세계 평화의 날’을 맞아 발표한 담화의 제목이 바로 ‘비폭력-평화를 위한 정치의 방식’입니다. ‘적극적인 비폭력이야말로 갈등보다 더 힘있고 더 결실이 있는 것임을 보여주는 길’이라고 강조하시죠. 우리는 이미 세계가 주목할 정도의 수준 높은 평화집회로 정치권이 일치된 결정을 하도록 결정적 힘을 발휘했잖아요. 이 평화와 연대의 경험이 일상에 녹아 들어 서로 화합하고 도우며 살아가던 잠재된 전통의 가치를 회복했으면 해요. 더 이상 ‘헬-조선’이 아니라 서로 돕는 ‘헬프-조선’이라는 말이 퍼지는 날도 오지 않을까요.”

-그 용기 있는 증언이 정말 아쉬운 때입니다.

“오늘도 청문회가 열린다는데, 얼마나 똑똑하고, 얼마나 많이 배웠다는 분들인데. 지식은 넘치고 지혜는 부족한 상황이에요. 물론 누구 한 명이라도 노(No)를 했다면 국정농단 사태가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죠.”

유흥식 주교는 "교회가 이웃과 세상을 섬기는 더 낮은 자세로 임하고, 다른 활동에서도 사회비판과 모순되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전=김혜영 기자
유흥식 주교는 "교회가 이웃과 세상을 섬기는 더 낮은 자세로 임하고, 다른 활동에서도 사회비판과 모순되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전=김혜영 기자

-교회나 신앙인이 할 일은 무엇일까요.

“일치가 갈등을 이긴다는 말을 교회가 먼저 증거해야죠. 지난 1년을 자비의 희년으로 지냈는데, 라틴어 자비(misericordia)는 본래 가난한 이들(miseri)에게 마음(cor)을 둔다는 뜻이에요. 결정적으로 가난한 이들, 고통받는 이들에게 우선적 관심과 사랑을 두면서 가난과 고통을 양산하는 사회구조나 부정부패에 대해 고발하는 것도 자비에 포함됩니다.”

-중점 두려는 계획이 있다면.

“언제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사람과 사랑이에요. 저희가 정의와 평화라는 가치를 위해 투신하는 것도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에 대한 절대적인 가치와 이웃에 대한 사랑 때문이고요. 요즘 세상일이 우리로 하여금 울분과 분노를 일으키죠. 그러나 우리가 정의로운 행동을 실천하더라도 분노의 감정이 과격하게 나타난다면 본래 의미는 약해져요. 고통받는 이웃에 대한 존엄성을 수호하려는 사랑과 연민이 행동의 주된 동기가 돼야 하는 거죠. 내년 1월 1일부터는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가 사회복지, 이주사목, 보건사목 평의회와 통합돼 ‘인간발전성(省)’으로 활동합니다. ‘정의, 평화, 창조질서 보존이라는 선한 가치를 위해 특히 무력분쟁과 자연재해의 희생자들, 모든 형태의 노예생활과 고문의 희생자들, 이민자들,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배척되고 소외된 이들, 감옥에 갇힌 이들과 고용에서 제외된 이들을 위해 좀더 효과적인 방법을 추진’하는 것이 목표에요. 저희 위원회도 이런 교황청 노력에 힘을 합하며 한국사회가 마주하고 있는 구체 현안에 대해 지속적으로 활동해 나가야죠.”

-곧 성탄입니다. 어떤 자세로 맞아야 할까요.

“성탄절은 이제 단지 그리스도인들만의 축제가 아니라 수 많은 사람들이 함께 기뻐하는 축제가 됐잖아요. 그러나 지나치게 상업적, 소비적으로 변질돼 있기도 해요. 여기서도 개인주의와 소비주의의 유혹은 여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복음 25장 ‘최후의 심판’에 대한 말씀에서 ‘헐벗고 굶주리고 목마른 이가 바로 나’라고 말씀하시죠. 이웃,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이 단순한 자선의 대상이 아니라 ‘또 다른 나’라고 생각하며 성탄을 맞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둡다고 한탄해도 어둠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둠이 사라지는 건 ‘어둡다’ ‘어둡다’고 외칠 때가 아니라 나 자신이 먼저 작은 촛불을 밝힐 때에요. 우리 앞에 놓인 과제들이 만만치 않지만 종종 생각했으면 합니다. 삶은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니라 살아내야 할 신비라는 것을요. 국정농단에 분노하는 신자 분들에게 ‘그럼 우리도 모두 정말 다 정직한가, 갑질한 적 없는가’라면 고개를 푹 숙이십니다. 마음을 다해 스스로 어둠을 이길 불을 밝히고, 내가 먼저 작은 최선을 다하는 데서 시작해야죠. 특별히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말씀을 구체적 체험으로 확신하시길 바랍니다. 모든 분과 가정에 사랑, 평화, 은총이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대전=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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