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 앞에 충무로가 ‘무릎’을 꿇었다. 사회비판적 영화를 준비하던 감독들이 박근혜ㆍ최순실 게이트로 드러난 현실을 뛰어넘을 수 없다며 잇달아 출사표를 거두고 있다. 극장가는 관객 감소세를 보여 이래저래 영화계가 국정농단에 두 손을 든 모양새다.
‘실미도’(2003)로 1,000만 관객 시대를 연 강우석 감독은 차기작으로 준비하던 ‘투캅스 vs 공공의 적’의 제작을 중단했다. ‘투캅스 vs 공공의 적’은 강 감독의 대표작 ‘투캅스’ 1, 2편과 ‘공공의 적’ 시리즈를 결합한 작품. ‘투캅스’의 비리 중견 경찰 조 형사(안성기)와 강직한 신참 강 형사(박중훈)가 ‘공공의 적’의 형사 강철중(설경구)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는 계획이었다. ‘해운대’(2009)와 ‘국제시장’(2014)의 윤제균 감독이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강 감독이 메가폰을 잡기로 한 이 영화는 안성기와 박중훈 설경구가 각각 예전 역할을 맡아 출연할 예정이었다. ‘투캅스’와 ‘공공의 적’ 시리즈의 만남이니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들추며 웃음과 함께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함께 전달할 것으로 기대됐다.
강우석 감독은 “사회비판적 영화는 관객들의 공분을 불러일으키고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에서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야 한다”며 “지금 같은 시국에서는 사회비판적 영화가 관객에게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고 밝혔다. 강 감독은 “모든 국민들이 뉴스 하나하나에 주목하며 청와대에서 벌어진 일들을 수사하듯 지켜보는데 어느 시나리오도 그런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이런 시국에선 오히려 크게 웃으며 인간미를 느낄 수 있는 영화가 더 제격”이라며 “그런 시나리오를 찾고 있다”고도 말했다.
지난해 ‘내부자들’로 900만 관객을 모은 우민호 감독은 차기작으로 검토하던 ‘내부자들2’의 제작을 포기했다. ‘내부자들’은 정계와 경제계, 언론계 인사가 비밀리에 결탁해 자신들의 입맛대로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해 화제를 모았다. 너무 소설 같은 내용으로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일부 받기도 했다. 우 감독은 최근 종합편성채널 JTBC와의 인터뷰에서 “‘내부자들’은 지금 이 시국에서 오히려 현실을 미화한 것이 아니냐는 그런 얘기도 종종 들어 저도 좀 혼란스럽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 사태가 발생하기 전까지 ‘내부자들2’를 같은 배우들을 데리고 다시 한번 해볼까(했다)”며 “그런데 지금 이 사태 때문에 영화를 못 만들 것 같다. 이거보다 어떻게 더 잘 만들 수 있겠나”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제작자들의 생각도 두 감독과 다르지 않다. 영화 ‘미녀는 괴로워’(2006)와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등을 제작한 리얼라이즈픽쳐스의 원동연 대표는 20일 페이스북에 띄운 글에서 “많은 영화인들이 자신들이 준비한 영화를 접고 있다”며 “현실이 기획한 영화보다 더 극악하고 처참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현실보다 더한 상황을 상정하고 영화를 만들면 되지 않겠냐고 하겠지만 그건 지옥이다… 막장도 아니고 그건 지옥이기에 차라리 펜을 부러뜨리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극장 관객들도 크게 줄었다. 영화진흥위원회 집계에 따르면 박근혜ㆍ최순실 게이트 보도가 절정을 이룬 지난달 전국 관객은 총 1,268만2,790명으로 지난해 11월(1,527만5,978명)보다 260만명 가량이 줄었다. ‘중박 영화’ 한 편이 사라진 셈이다.
라제기 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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