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 ‘2016년의 여성 100인’
남아공 대통령 비리 파헤쳐
아프리카에 희망 심은 마돈셀라
‘여신’ 쿠마리의 길 새로 개척한
네팔 바즈라치리야도 눈길
황산 테러 딛고 인권운동가로
콜롬비아 폰세는 ‘회복’ 아이콘에
플러스 사이즈 모델 英 로런스와
다운증후군 디자이너 테자도 포함
영국 BBC방송이 ‘2016년의 여성 100인’ 명단을 공개했다. 미 대선 후보 힐러리 클린턴이나 한국 박근혜 대통령이 화제를 모은 여성 지도자로 이름을 올릴 것이란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름도 생소한 남아공의 국민권익보호위원장, 남성 프로축구팀을 이끄는 홍콩의 여성 감독이 올해를 빛낸 여성으로 선정됐다. 모두 세계 곳곳에서 자신에게 닥친 역경에 맞서 싸우거나, 한계를 극복하며 나름의 성취를 이룬 ‘작은 거인’들이다. 덜 알려지기엔 너무 위대하기에 더 알려져야 할 여성들을 조명했다.
영향력: 남아공의 양심
100명의 여성들은 영향력(infulential), 개척(pioneer), 저항(defiant), 회복(resilient), 창의성(creative) 분야에 20명씩 선정됐다. 우선 사회를 변화시킬 만큼 영향력을 행사한 여성에는 ‘남아공의 양심’으로 불리는 툴리 마돈셀라(54) 국민권익보호위원장이 포함됐다. 그는 제이콥 주마 대통령이 지명해 권익위원장이 됐지만, 철저하게 중립적인 태도로 대통령의 비리를 파헤친 여걸이다. 분노한 국민들이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며, 남아공은 정치적 격변의 시기에 돌입했다. 외신들은 “마돈셀라의 용기는 남아공뿐 아니라 아프리카 대륙에 변화의 희망을 불어 넣었다”고 평가했다.
프랑스 법무장관 출신의 정치인 라쉬다 다티(51)도 영향력 분야에 포함됐다. 모로코 출신의 일용직 노동자 아버지와 알제리 출신 어머니는 모두 문맹이었다. 12남매 가운데 둘째였으며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14세부터 화장품 방문 판매원으로 취업 전선에 뛰어 들었고 주경야독해 검사가 됐다. 2007년 42세 젊은 나이에 무슬림계 여성 최초로 법무장관으로 발탁됐다. 화려한 외모로 늘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과 염문설도 나돌았다. 법무장관직을 수행하며 미혼으로 임신했지만, 전과 다름없이 출근 했고 건강한 남아를 출산했다. 늘 당당한 태도로 무슬림 여성들의 롤모델로 꼽힌 그는 “내 삶은 (언제 붕괴될 지 모르는) 면도날 위에 서 있었다”고 BBC에 말했다.
개척: 네팔의 살아있는 여신
네팔의 차니라 바즈라치리야(21)는 ‘살아있는 여신’으로 불린다. 네팔은 어린 소녀를 여신(쿠마리)으로 모셨다가 초경 직후 사원에서 쫓아내는 전통이 있다. 신성이 없어졌다는 이유에서다. 다섯살에 쿠마리가 된 치리야도 15세에 생리를 시작하며 버려졌다. 역대 쿠마리들은 여신에서 물러난 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비참한 삶을 살았지만, 그는 중등교육과정 졸업시험에 응시해 합격하는 등 교육의 끈을 놓지 않았다. 치리야는 현재 전직 쿠마리들을 교육하고 지원하는 단체를 만들어 ‘개척자’로의 삶을 살고 있다.
사회 여러 분야에서도 가장 ‘유리천장’이 견고한 스포츠계. 그 중에서도 금녀(禁女)의 자리인 남성 프로축구팀 감독 자리를 꿰찬 여성도 BBC의 관심을 받았다. 지난해 홍콩 1부리그 축구팀 이스턴스포츠클럽의 감독이 된 찬유엔팅(28)이 주인공이다. 심지어 찬유엔팅은 팀을 우승시키는 기적 같은 성취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축구 전력분석관으로 경력을 시작했고 유소년 팀을 지도하며 우승을 경험했으며 홍콩 여자대표팀 코치를 지내면서 실력을 쌓았다. 올해 아시아축구연맹이 주는 감독상을 수상한 그는 “유럽에서도 여성감독은 여자축구팀을 포함해 두세명 밖에 없다고 들었다”며 “내가 축구감독에 도전하는 여성들에게 좋은 예가 됐으면 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바즈라치리야와 찬유엔팅을 포함해 모두 4명의 아시아 여성들이 ‘개척자’로 소개됐다. ‘아시아 여성들은 보수적이다’는 편견을 보란 듯 깨트린 것이다. 중국에서 사회활동을 하며 여성의 생리휴가를 얻기 위해 캠페인을 벌이는 정추란(鄭楚然ㆍ27), 여성 셰르파로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후 지금까지 7번을 더 오른 네팔의 락파 셰르파(43)도 아시아의 개척자로 선정됐다.
회복: 콜롬비아의 황산 테러 피해자
콜롬비아 상원은 지난해 황산 등 화학물질을 이용해 타인을 공격하는 범죄자에 최대 50년의 징역형을 처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법안에는 여성의 이름인 나탈리아폰세가 붙었다. 나탈리아폰세 데 레온(35)은 지난해 3월 구애를 거절한 남성으로부터 황산 공격을 당해 얼굴과 온몸의 피부가 녹아 내린 테러 피해자다. 지금까지 20여 차례가 넘는 피부조직 재생 수술을 받았다. 그럼에도 일그러진 얼굴로 외부 활동을 할 때는 가면과 모자를 착용한다. 레온은 재활을 포기하지 않았고 자신의 경험을 담은 ‘나탈리아 폰세의 환생’이라는 자서전을 발간했다. 인권운동가로 거듭나 자신의 이름을 단 법안 통과를 주도했고, 현재 자신과 같은 남성 폭력 피해 여성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일본 최고의 인기 아나운서이자 배우 고바야시 마오(小林麻央ㆍ34)도 이름을 올렸다. 그는 투병사실을 말하길 꺼리는 일본 대중연예계의 소극적 분위기를 깨고 올해 초 과감히 유방암에 걸린 사실을 공개했다. 이후 고코로(心ㆍ마음)라는 이름의 개인 블로그에 일상과 심정을 공개하며 대중과 소통한다. 현재 폐와 뼈에도 암세포가 전이된 말기암(4기) 상태. 때론 “죽고 싶지 않다” “누가 살려줬으면 좋겠다” 등의 비관적 심정을 담은 글도 올라오지만, “병이 나를 규정하진 않는다” “멋진 사랑을 만났고, 두명의 아이를 낳으며 축복 받은 삶을 살았다”는 등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이며 일본 열도에 먹먹한 감동을 전달하고 있다.
저항과 창조: 다운증후군 패션 디자이너
저항 분야에서는 여성을 향한 뿌리 깊은 편견과 제도적 차별에 용감히 맞선 이들이 포함됐다. 영국의 이스크라 로런스(26)는 뚱뚱한 여성은 모델을 할 수 없다는 편견을 깬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다. 여성의 스포츠 활동이 금지된 팔레스타인에서는 자전거를 타고 여성을 향한 차별에 맞서는 ‘자전거 저항가’ 암나 슐래이만(33)이 포함됐다. '메리'라고만 알려진 테러조직 알샤바브 납치ㆍ성폭행 피해자는 100명 중 유일하게 사진이 실리지 않았다.
창조 영역에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올해 여름 휴가 책 리스트에 포함함 소설 ‘걸 온더 트레인’의 저자 폴라 호킨스(44)와 다운증후군 환자이지만 패션디자이너로 런던 패션위크에 옷을 선보인 이사벨라 테자(20)가 선정됐다. 허핑턴포스트는 BBC의 선정에 대해 “2016년이 여성을 위한 저항의 한 해였음을 보여주는 명단”이라고 풀이했다.
정지용 기자cdragon2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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