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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그대로라면… 촛불 뒤 우리는 다시 우울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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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그대로라면… 촛불 뒤 우리는 다시 우울할 겁니다”

입력
2016.12.15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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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자 엄기호씨가 14일 서울 서교동 창비학당 지하에서 대학생 독자들과 세상을 리셋하는 방법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사회학자 엄기호씨가 14일 서울 서교동 창비학당 지하에서 대학생 독자들과 세상을 리셋하는 방법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우리 사회, 지난 몇 년간 계속

광장의 조증ㆍ일상의 울증 반복

‘한국은 헬조선이고 구제불능’

분노만으론 세상 바꿀 수 없어

“요즘 제일 괴로운 게 주변에서 접하는 너무 많은 분노들이에요. 이 참에 다 망해버렸으면 좋겠다, 확 전쟁이나 나버려라, 이런 말들. 나부터도 세상을 리셋하고 싶지만, 자기를 파괴하는 원한에 휩싸이면 안 된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리셋은 복수와 원한이 아니라 ‘내가 훌륭해지도록 도와달라’ ‘나도 너가 훌륭해지도록 기꺼이 돕겠다’는 쪽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어요. 우리는 우리를 잘 돌보는 사람이 되고,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 해요.”

사회학자 엄기호(45)씨의 말에 왁자하게 웃던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14일 서울 서교동 창비학당 지하에 열린 대담 자리에서였다. 엄씨는 ‘흙수저’ ‘노오력’ ‘헬조선’ 같은 지금 우리 시대의 키워드를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창비)라는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절망, 굴욕, 분노, 허탈 같은 감정이 기묘하게 뒤섞인 문장이다. 이 책을 읽은 대학생 김민지ㆍ오지영ㆍ김유빈ㆍ조은비씨가 저자와의 대화를 요구했다. 나의, 시대의 고민을 받아 안은 저자의 육성을 들어보고 싶다는 요청이었다. 참가자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오간 대화를 질문과 대답으로 재구성했다.

-헬조선 담론이 넘실대는데, 어떻게 이런 책을 기획하게 됐나요.

“흔히 요즘 학생들은 패기가 없다, 무기력하다는 말들을 많이 하죠. 그런데 강의를 나가 교육 현장을 직접 겪어보면 무기력이 아니에요. 사회에 대해, 자기에 대해 과격한 말을 거침없이 뱉어내요. 해외를 나가보면 우리뿐 아니라 프랑스, 홍콩 어디랄 것 없이 다 그래요. ‘이 사회는 구제불능이다’ 같은 일종의 ‘자국 혐오주의’랄까요. 이 현상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할 지, 궁금했어요.”

-강남역 살인사건, 세월호 사건 같은 걸 보면 혐오감이 들지 않을 수 있을까요. 보호 받지 못한다는, 약자들부터 먼저 당한다는 느낌 같은 것들이 강해요. 이 나라에서 아이 낳고 싶지 않다는 말에 굉장히 공감해요.

“그걸 제 표현으로 고치자면 ‘이 나라에서 나의 성장은 불가능하다’고 느낀다는 거예요. 누구나 성장을 바라지요. 세상을 좀 더 잘 알아가고 현명해지고 싶은데, 성장은커녕 단지 소모될 뿐이라고 느끼는 거지요. 개인의 성장, 성취는 온데 간데 없고 오직 성과로만 평가 받으니 그래요. 최근 들었던 가장 재밌는 말 중 하나가 ‘공부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공부를 못하겠다’는 얘기에요. 우리는 대체 무엇을 위해 그토록 열심히 공부하는 걸까요.”

-공부하느라 공부 못한다는 얘기가 와 닿아요. 우리나 친구들도 졸업을 미루고 자격증을 따고 더 많은 스펙을 갖춘다는 핑계로 도서관에 파묻히니까요. 유예나 도피 쪽에 가까운 것 같아요. 무엇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되어야 할까요.

“참 쉽지 않아요. 원래 기득권의 변화에는 밖에서는 공격, 비판 못지 않게 내부의 붕괴과정이 중요해요. 그런데 한국의 기득권층이 내부에서 붕괴할까요? 양심이나 합리성이 없어서 그리 될 것 같지 않아요. 당장 ‘최순실 게이트’만 해도 지금 문제가 된 박근혜 대통령만 핀셋으로 쏙 뽑아낸 채로 그대로 가려 할걸요. 또 하나는 전문가들이 전문가로서의 자존심과 자율성이 없다는 거에요. 전 안종범 수석을 보고 상당히 놀랐어요. 제가 알기로 안 수석은 그래도 학계에서 평이 좋은, 우파 중에 복지 정책에 밝은 사람으로 소문나 있던 중견 학자예요. 그런데 그에게서 전문가로서의 소신을 찾아볼 수 있었나요. 아니 할 말로 심부름꾼처럼 살다 구속됐어요. 저도 공부한다는 사람인데 자괴감을 느낄 정도에요. 기득권층의 내부 붕괴, 전문가 집단의 비판이 없다면 우리가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관철할 수 밖에 없어요.”

정규직ㆍ비정규직 구분에서 보듯

위ㆍ아래 아닌 안과 밖 계급 사회

‘우리는 다 같은 동료 시민이다’

일상의 민주화 통해 촛불 완성을”

-지금 우리 사회의 계급은 ‘위’ ‘아래’가 아니라 ‘안’과 ‘밖’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내용은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우리는 ‘아래’에 있는 게 아니라 ‘밖’에 있다는 건데, 이 사회가 우리에게 주는 불안감을 정말 잘 표현한 것 같아요.

“아래라는 건, 보호장치가 있다는 거예요. 위, 아래라는 건 어쨌든 같은 공간 안에 있다는 얘기는 되니까. 그런데 지금은 안과 밖으로 나뉘는 세상이에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대표적이지요. ‘죽도록 노력해라, 그러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겁니다. 그런 얘길 들으면 ‘삶과 죽음 사이의 선택이 아니라 죽음과 죽음 사이의 선택’이라던 미국 해방노예의 말이 생각나요. 안팎의 계급사회에서는 밖에서 죽거나 안으로 들어가려다 죽는 거지요. 구의역 사건이 대표적이에요. 제가 거꾸로 물어볼게요 안과 밖의 계급사회, 이거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글쎄요. 안을 좀 더 넓혀야 하지 않을까요.

“전 안으로 오라고 하는 건 실은 밖으로 밀어내는 거라 생각해요. 우리는 공동체로서 원래 안에 있던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선을 긋고 넌 밖이니 안으로 오라고 해요. 안과 밖의 논리란 결국 배제와 추방인 거죠. ‘우리는 원래 안에 함께 있었던 동료 시민들이다’라고 당당하게 주장하고 요구할 수 있어야 해요.”

-그런데 쉽지가 않아요. 촛불시위만 해도 아직도 우리 할머니 같은 분은 박근혜 대통령이 불쌍하다고 해요.

“그것도 우리는 다 같이 안에 있는 동료시민이라는 처지에서 접근해야 해요. 맞아요. 어르신들에게도 문제가 많아요. 그런데 우리도 제대로 말 걸고 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봐야 해요. 가장 초보적인 예를 들자면 60대 이상 되신 분들 얘길 들어보면 맞춤법 문제 때문에 인터넷에서 망신 당한 경험이 있으세요. ‘꼰대’니 뭐니 하는 이유로 계속 내몰리고, 시끄럽기만 한 종편 따위를 보는 무식한 늙은이들이라 조롱 당하니 문화적인 소외감 같은 것이 엄청나요. 그러다 보니 원한이 쌓이는 거지요. 그 분들 문제도 있지만, 동시에 우리가 그 분들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하는지 모르고 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고 봐요.”

-촛불시위가 한창인데, 뭔가 바뀌긴 할까요.

“혁명 이후, 일상의 민주화가 중요해요. 우리 사회는 지난 몇 년간 ‘광장의 조증’과 ‘일상의 울증’을 반복하고 있어요. 촛불 신나게 했는데 변하는 건 없고. 광장이 닫히면 우울해지는 거요. 미국 정신과 의사들이 ‘일상의 우울증이 조증 포퓰리스트를 낳는다’고 분석했다는 얘기가 있어요. 우울한 사람들은 천박하게 아무 말이나 막하는 조증의 지도자를 택한다는 거죠. 트럼프가 대표적이죠. 우리에게 그 징후는 ‘사이다 발언’이라 생각해요. 속 시원하다는 건 이해하겠는데, 다들 뱃속에 고구마가 가득 찼는데 자꾸 사이다만 찾아선 안 되는 거죠.”

-앞으로 어떤 책을 준비하고 계신가요.

“이인성의 소설 제목이기도 한데 ‘식물성의 저항’에 대해 쓰고 싶어요. 개인적으로 전 소심하고 겁도 많고 소심한 식물성 인간이에요. 그러다 보니 거친 육식성 인간들을 무서워해요. 여기 둘러앉은 사람들도 책 좋아하는, 다들 식물성 인간들인 거 같은데 우리 같은 사람들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탐구해보고 싶어요. 사회라는 것이 나처럼 소심하고 간이 작은 사람들도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대신 식물이라는 게 한 곳에서 뿌리를 내리잖아요. 오래 지속되는 힘은 있는 거지요. 그런 식물성이 하는 저항은 육식성의 저항과 어떻게 다르고 같을까, 어떤 점이 좋고 나쁠까, 궁금해요. 하지만 우르르 몰려다니며 시위하는 저항 못지 않게 중요한 저항임에는 분명하다고 생각해요.”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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