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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미 칼럼] 보수와 진보 사이

입력
2016.12.15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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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보수의 아이콘이라는 대통령과 집권당의 민낯을 지켜보면서 스스로 보수라는 자부심을 느기고 살아왔던 이들이 더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다. 정도와 종류는 다르지만, 진보 쪽 역시 이런저런 일들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던 적이 있었을 것이다. 진보니 보수니, 말의 잔치는 넘쳐났지만, 정작 그 둘의 정의와 지향점, 가치관 등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는 많지 않은 것 같다. 사전적 의미로 보자면 보수는 사회의 전통과 관습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지켜나가는 태도, 진보는 새로운 세계로의 지평을 열고자 하는 태도다. 하지만 옛것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새로운 것이 가능하다는 온고지신의 정신과 같이, 누적된 과거 경험에 대한 존중과 배움 없이 창조적 진보는 불가능하다. 많은 이들이 오로지 보수적인 인물로만 간주하는 공자님도 생전에는 진보적 가르침을 전파한 혁명적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후세 사가들이 혁명적이라 평가하는 실학자들도 그 당시 자신들은 주자학을 이어받은 학자라 내세웠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닫힌 보수, 과거를 부정하는 붕 뜬 진보는 타락한 도그마일 뿐이다.

우리나라는 보수와 진보에 대한 개념이 더 혼란스럽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주장한 애덤 스미스와 이기적인 인간들은 이익이 되어야 협동도 자선도 한다는 홉스의 철학을 따르는 순수 시장경제 신봉자들은 사유재산과 개인의 자유를 절대적 가치로 지키려 한다. 평등한 기회, 복지와 분배 주장은 공산주의 폭도나 철없는 이상주의자의 궤변이라 말한다. 자신이 일군 부와 지위는 그 누구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에서 나온 태도다. 반대로 부패한 사회 구조 때문에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지 않고, 땀 흘리는 노력 없이 정의롭지 않은 자본과 부자 부모덕에 호의호식하는 세상은 바꾸어야 한다는 이들이 주로 진보세력이 된다. 친일파와 독재 비호 세력들이 부정한 방식으로 거대 자본가가 되었던 역사, 완장 찬 김일성주의자들이 무도하게 선한 이들의 재산과 자유를 유린했던 기억들이 양측이 대립하는 골을 더욱 깊게 하는 것 같다. 비극적인 배경에 휘둘리지 말고, 보수ㆍ진보에 대한 철저한 개념정리부터 다시 해야 하는 이유다.

보수와 진보, 무엇이 더 우월하냐를 따지기 이전에 우선 필요한 작업은 인간 본성, 특히 도덕과 욕망에 대한 숙고다. 20세기 이후 정신분석은 양심, 도덕, 이성을 무력하게 만드는 본능, 무의식, 감정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해왔지만 그보다 훨씬 전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흄은 이성이 감정에 좌우된다는 점, 그래서 이성이 꼭 선한 것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일찌감치 간파한 바 있다. 관습과 전통이 사회의 유용한 안내자일 뿐, 사회가 인간 본성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고도 했다. 사회가 아무리 개선되어도 인간의 심성은 별로 변하지 않으리라는 그의 인식은 사회 개혁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칼 융 같은 현대의 분석심리학자들은 개인뿐 아니라 집단 심리의 양면성을 지적하면서 인간의 마음은 창조와 파괴 양쪽으로 역사를 끌고 갈 수 있기에 개인과 집단 무의식에 대해 인식하고 분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개개인의 의식화와 깨달음 없이 일부 엘리트가 만든 사회변화가 역사상 오랫동안 견고하게 유지되었던 적은 사실상 없다. 반면에 적지 않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인간의 선한 본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서 경제적인 불평등이 해소되고 사회 변화가 일어나면 심성이 변해 유토피아에 근접한 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뛰어난 철학자와 심리학자들이지만 복잡계인 인간사회에 대한 완벽하면서도 단순한 해결방법을 제시하지는 못한 것 같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라는 플라톤의 비전 역시 판타지 소설같이 비현실적이다. 이상 국가인 미래 세대가 되면 황금 핏줄을 타고나 남에게 명령하는 지도자 계급, 은핏 줄의 보조 계급, 구리와 쇠가 섞인 핏줄의 노동자 계급으로 나뉜다고 했는데 언뜻 보면 요즘 말하는 금수저, 흙수저론과 비슷하게 들리지만 결정적으로 다르다. 통치계급에 속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지혜를 갖추되 사유재산도 자기 소유의 부인과 자식도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마르크스의 무산계급 독재론에 가깝다. 둘 다 탁월한 엘리트 정권의 공명정대함을 믿었으니 순진한 이상주의라고 할까.

많은 보수가 어차피 역사는 진보하지 않고 욕망의 노예인 인간은 경쟁이라도 해야 생존한다, 그래서 능력에 따라 분수껏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극화를 가져온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가치에 부합되는 태도다. 반대로 타인에 대한 사랑과 배려를 지향하며 욕망을 조절할 수 있는 집단지성을 신뢰하는 진보는 높은 세금과 공평한 교육기회로 사회주의 체제와 유사한 북유럽 모델을 높이 사지만, 우리 경제가 그만큼 탄탄한지 점검과 보강 노력은 부족한 것 같다. 물론 탄핵 정국은 보수나 진보의 갈등에서 벌어진 것이 아니라, 최고 권력자와 그 주변의 비정상적인 행태 때문에 비롯되었지만 이번 기회에 폭력적인 극우와 극좌, 냉소적 현실주의와 허황한 이상주의를 뛰어넘는 건강한 보수와 진보가 공존하는 성숙한 사회로 거듭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이나미 이나미심리분석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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