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대통령은 국민들이 혐오하는 우리 정치에 대한 최고의 쇄신이다.”
2012년 10월 14일 당시 김무성 새누리당 총괄선대본부장은 박근혜 대선 후보를 지지하며 이렇게 치켜세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준비된 여성대통령’은 새누리당의 18대 대선 전략을 상징하는 슬로건이 됐다. 그리고 박 후보는 우리사회에서 가장 높은 유리천장을 깨고 첫 여성대통령이 됐다.
4년 뒤 요즘 그 신화가 깨지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 때문에 헌정 사상 첫 피의자 신분의 대통령이 돼 특별검사팀의 수사 대상이 있다. 대통령직 또한 국회의 탄핵 결정으로 직무 정지된 상태에서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심리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열 자식 굶기지 않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국민 모두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던 박 대통령의 약속은 이제 지키지 못할 거짓말이 됐다. 여성대통령에 대한 기대가 무너진 이유와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여성들에게 어떤 빚을 남겼는지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봤다.
여성대통령 시대, 여성들 삶은 뒷걸음
박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일각에서는 여성들의 삶이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다. 지난 대선 때 박 대통령에게 표를 던진 정희현(49·여)씨는 “남성 중심의 우리 정치에서 ‘선거의 여왕’으로 집권여당을 이끈 포용력 있는 리더십과 정치경력을 높이 평가했다”고 말했다. 한은미(31·여)씨도 “우리나라에도 독일의 메르켈 총리 같은 여성 리더가 있으면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며 “생애 주기별 복지와 여성정책이 보다 잘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로 뽑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근혜정부 4년간 우리 사회의 성 평등 지표는 더 나빠졌다. 세계경제포럼(WEF)이 지난 10월 발표한 '세계 성 격차 보고서'를 보면 성별 격차와 여성의 지위를 나타내는 성격차 지수 항목에서 한국은 145개국 중 116위다. 박 대통령이 당선된 2012년 108위보다 순위가 더 떨어졌다.
눈 여겨 볼 부분은 여성의 정치적 권한을 평가한 부분으로, 2012년 86위에서 올해 92위로 뒷걸음질쳤다. 여성의원과 장관 비율이 적기 때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10년째 꼴찌를 기록한 성별간 임금격차도 2012년 36.3%에서 2015년 37%로 더 벌어졌다.
“박 대통령의 실패, 여성정치인의 실패 아냐”
여성계에서는 ‘박 대통령을 여성을 대표하는 여성정치인으로 바라볼 수 있느냐’는 주제로 오랜 시간 논쟁해왔다. 결론은 가부장제의 고정관념에 맞서는 여성주의 의식이 부족하고 민주화의 역사적 의미를 퇴보시킨 인물이라는 부정적 목소리가 높았다.
도리어 여성계에서는 박 대통령이 여성운동의 역사와 성과에 무임승차해 당선됐다고 보고 있다. 최순영 전 민주노동당 의원은 “박 대통령은 여성정치인이라기 보다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라는 자산을 발판 삼아 지역주의에 기대어 성장한 구시대적 정치인”이라고 꼬집었다. 손희정 문화평론가도 “박근혜 대선캠프에서는 준비된 여성대통령이라는 슬로건을 액세서리처럼 활용했을 뿐 실제 성공요소는 아버지 시대의 향수를 자극하고 유신시대의 인물을 재활용한 것”이라면서 “박 대통령의 성공이 여성성 덕분이 아니듯 그의 실패를 여성정치의 실패로 볼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박근혜식 여성정치는 아이돌식 팬덤에 기댄 것”
그렇다면 ‘박근혜식 여성정치’는 어떻게 봐야할까. 전문가들은 박 대통령이 성 고정관념과 성 차별 의식을 재생산하는 방법으로 영향력을 확대해 왔다는 점을 지적한다.
사실 박 대통령은 부드러운 외모를 제외하면 리더십 부문에서 여성적이라 통칭되는 특성을 찾긴 어렵다. 하지만 성별화된 고정관념이 갖고 있는 여성성을 적극 활용해 ‘이미지 정치’를 해왔다는 분석이다. 권명아 동아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박 대통령을 ‘아이돌형 팬덤을 지닌 정치인’이라며 ‘겨울왕국’의 주인공 엘사와 같은 '입신출세형 여성'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이런 리더는 부모를 여의고 홀로 역경을 딛고 세상과 마주해야 해 언제든 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어 지켜줘야 하는 소녀 같은 존재이면서 위기 상황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얼음여왕과 같은 이중적 모습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 대통령에게 아이돌형 팬덤을 제공하는 것은 박근혜대통령을 사랑하는 모임(박사모)이다. 권 교수는 “박 대통령은 언어 없이 이미지만 반복 재생산하는 탈 정치화된 방식으로 대중에게 호응을 얻었다”며 “그 바람에 박사모로 대표되는 콘크리트 지지층이 마련됐다”고 분석했다. 그는 “연설문을 고쳐주는 최순실이 등장하며 제어할 수 없는 미친 여왕의 모습이 드러나자 박 대통령이 활용했던 ‘한국적 여성성’이 공격 받고 무너졌다”고 덧붙였다.
그 바람에 과거에 보수진영에서 강조한 강직한 여성 리더라는 박 대통령의 이미지는 이제 풍자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권 교수는 “한국사회에서 여성성이 소비되는 방식에 여전히 여성혐오적 시선이 들어 있다”며 “최고 권력자인 박 대통령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분석했다.
박 대통령이 여성들에게 남긴 빚
문제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빚어진 박 대통령의 실패를 여성 리더십, 나아가서 여성정치의 실패로 잘못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직장인 박가람(31·여)씨는 “대통령의 성형·약물 의혹이 나오면서 ‘한국 여성들은 성형 중독자’라는 여성혐오적 발언이 아예 농담이 됐다"며 "암탉이 울면 집 안이 망한다는 편견을 더 퍼뜨린 대통령이 야속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여성대통령에게 기대했던 가치들이 무너진 자리를 여성혐오가 채우고 있다. 급기야 광장에 선 여성운동가들은 “박 대통령은 여성을 대표할 수 없다”는 선언을 했다. 손희정 문화평론가는 “박 대통령 사태 이후 성형녀, 된장녀, 강남엄마와 같은 여성혐오 현상이 확산되고 있다”며 “그러나 박 대통령의 문제는 성별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역설했다. 또한 한 명의 여성 정치인의 실패 때문에 여성들이 다시 가부장적 사고인 ‘개념녀’틀에 갇히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사회가 여성주의정치를 고민할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손씨는 “여성정치인이라면 엄마의 마음으로 돌본다거나 더욱 청렴할 것이라는 믿음은 남성중심의 정치적 편견에 따라 만들어진 수사”라며 “다음 대선에서는 남성정치와 여성정치라는 이분법에 갇히지 말고 여성정치인이 추구해야 하는 가치, 다양한 계층의 여성들과 약자들의 권익을 실천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페미니즘 정치를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지현기자 hyun1620@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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