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된 지난 9일 밤. 한 지방도시의 삼겹살 집에서다. 구석 쪽에서 혀 꼬인 여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새누리당 비주류, 방울 달고 나온 번지르르한 X들! 다 나쁜 X들이야. 평생 서방 한 번 못 둬 본 여자를, 응, 그렇게 버린단 말이야!” 홀 안 손님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 여성에게 향했다. “나! 지금부터 박사모 할래, 남자X들이 다 찌질이니까!” 난감해 눈만 껌벅거리는 자신의 남편 앞에서 여성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자칫 손님끼리 말다툼이라도 벌어지는 것 아닌가 싶었다.
▦ 하지만 중년 손님들로 서너 테이블 채워진 홀은 이내 박근혜를 위해 건배를 나누는 묘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뜻밖에 청개구리처럼 작고 여린 사람이었다. 유치원 원장이라고 했다. 그런 사람이 술에 취해 코맹맹이 소리를 하니, 오히려 다독여 주고 싶은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따져 보면 ‘서방 한 번 못 둬 본’ 것 때문에 박 대통령이 불쌍하다는 얘기도 엉뚱하고 웃겼다. 그런데 그렇게 술잔을 나누다 보니, 이른바 ‘탄핵 역풍’이란 게 이런 식으로 시작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탄핵 역풍이란, 대통령 탄핵은 자칫 그걸 주도한 세력이 오히려 타격을 받는 정치적 결과를 낳는다는 얘기 정도로 보면 된다. 2004년 3월 국민 60% 이상은 문제가 된 선거 개입 발언에 대해 노 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국회가 정작 탄핵안을 처리하자 순식간에 민심이 돌아섰다. 그 결과 국민은 4월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에 국회 과반인 152석을 차지하는 정치적 승리를 안겼다. 물론 그때와 지금은 얘기가 전혀 다르다. 그땐 대통령 사과에 대한 공감에도 불구하고, 탄핵엔 국민 65% 이상이 반대했다.
▦ 반면 이번엔 애초부터 탄핵 찬성이 81%에 달했다. 그만큼 박 대통령과 최순실의 국정농단이 심각했다. 그런데도 탄핵 역풍이 없으리라는 기대는 섣부르다. 박근혜에 대한 잠재된 인간적 연민 같은 것 때문만은 아니다. 탄핵안 처리 후 정치적 혼란이 장기화할 경우, 정치 자체에 대한 국민의 혐오가 탄핵 민심을 희석하는 부작용을 낳기 십상이다. 야당은 이미 거국총리를 세우는 데 실패함으로써 국정 책임세력으로서의 기대를 저버렸다. 당장 정신 차리지 않으면 탄핵 역풍이 부는 건 순식간이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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