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는 이름, 스무살. 그러나 누군가에게 그 스무살은 힘껏 살아내야만 하는 날들이다.
장애진씨는 팔에 노란리본 문신을 새겼다. “팔찌는 잃어버릴 수도 있고 낡기도 하니까.” 아이를 좋아해 유아교육과에 가려 했던 장씨는 ‘그날’ 이후 진로를 바꿔 응급구조학과에 진학했다.
이종범씨는 친구 허재강씨의 사진을 늘 지갑에 넣고 다닌다. “살아 있었다면 함께 대학에 다녔을 텐데.” 그 마음으로 이씨는 대학 학생증을 친구의 납골당에 두고 왔다.
1년 전 태권도를 다시 시작한 양정원씨는 어느 날 벽에 세워둔 매트를 보고 공포를 느꼈다. 그날 기울어진 배 안에서 친구들이 캐비닛에 깔렸고, 양씨는 맞은 편 방으로 떨어졌다. 차오르던 물보다 기울어진 공간이 양씨는 더 두렵다.
마지막 생존자로 기록된 박준혁씨는 누구보다 열심히 세월호 참사 관련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대학 학생회 활동에도 아주 열심이다. 선배들과도 많이 친해졌다. 하지만 또래 동기들과 사귀는 건 아직 어렵다.
13일 방영된 EBS 다큐프라임 ‘감정시대’ 5부 ‘스무살, 살아남은 자의 슬픔’ 편에서 전한 세월호 참사 단원고 생존자 4명의 이야기다. 그날로부터 900여일이 지났지만 이들의 시간은 아직 그날에 멈춰져 있다. 수학여행을 떠난 단원고 2학년 학생 325명 중 생존자는 75명. 단지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그리고 친구를 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생존자들은 여전히 아파하고 있었다.
네 사람은 용기를 내 카메라 앞에 섰다. 제작진은 조심스럽게 그날의 기억을 꺼냈다. ‘너무 잔인한 질문은 아닐까.’ 그런데 뜻밖에 담담한 목소리가 건너왔다. 그들이 눈물을 터뜨린 대목은 사고 얘기가 아니었다. 친구들에 대한 얘기를 할 때였다. ‘스무살, 살아남은 자의 슬픔’ 편을 기획한 김미지 작가는 “생존자들은 사고 자체가 아니라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친구를 잃은 슬픔에 힘들어하고 있다”고 말했다.
2014년 11월 방영된 EBS 다큐프라임 ‘가족쇼크’에서 세월호 참사로 아이를 잃은 단원고 부모 96명의 이야기를 담았던 제작진은 2년을 기다려 스무살 대학생이 된 생존자들을 다시 만났다. 설득은 쉽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제작에 착수한 지난 4월까지만 해도 특례입학 문제로 악의적인 댓글에 시달렸고 아직 대학 친구들에게 단원고 출신이라고 말하지 못한 생존자들도 있었다. 김 작가는 “섭외에만 80%의 공력을 쏟았다”고 말했다. ‘가족쇼크’ 편에 참여했던 유가족들도 “EBS 다큐멘터리팀은 믿을 수 있다”며 생존자 가족들을 독려했다.
제작진은 촬영에 앞서 출연자와 부모들을 자주 만나 그들의 마음을 열었다. 방송이 또 다른 상처를 주지는 않을까 각별히 주의했다. 그럼에도 사고 당시 영상을 편집할 땐 제작진도 많이 힘들었다. 그 장면을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세심하게 살폈다. 기획 단계에선 출연자의 얼굴을 가리자는 얘기도 나왔다. 김 작가는 “생존자들이 잘못한 일도 없는데 왜 얼굴을 가려야 할까”라고 반문했다.
다행히 방송을 본 출연자 가족들은 만족스러워했다. 김 작가는 “이 방송이 다른 생존자 가족들에게도 힘이 됐으면 한다”고 바랐다. 그리고 ‘사회적 기억’의 필요성에 대해 힘주어 말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도, 성수대교 붕괴사고도,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았다. 기억을 지워버린 거다. 단원고 기억교실이 사라진 것이 가장 안타깝다. 가장 먼저 보존해야 하는 공간이 교실 아닌가. 기억에도 증거가 필요하다.” 제작진은 2주 동안 기억교실 이전 과정을 기록했다. 이 영상을 곧 세월호 기억저장소에 전달할 예정이다. 방송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라도 ‘기억’하려는 일에 동참하고 싶었다.
박준혁씨는 경기교육청 안산지청으로 임시 이전된 교실을 둘러보면서 “그래도 없어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박씨는 방송에서 “살아남은 친구들까지는 안 바라고, 먼저 간 친구들만이라도 기억해주고 나쁘게만 생각 안 했으면 좋겠다”는 얘기도 했다. 그간 싸늘한 시선 속에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케 해 가슴이 저며온다. 김 작가도 “생존자들이 우리 사회에 대한 기대를 잃었기 때문”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래도 스무살 생존자들은 먼저 떠난 친구를 위해 뭐라도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오늘을 힘껏 살아가고 있다. 세월호 관련 행사에 열심히 참여하고 친구 생일엔 그의 부모님도 찾아 뵙는다. 장애진씨는 부모님과 가끔씩 분향소를 찾아가 유가족을 안아드리곤 한다. 건축학을 전공하는 양정원씨는 건축 모형을 만드는 수업에서 세월호를 만들어볼 결심을 했다. 양씨가 기울어진 것들에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담당 교수의 제안에 양씨는 세월호 대신 미끄럼틀을 만들며 자기 안의 두려움과 맞섰다. 생존자들은 지난 여름 도보행진에 참여해 3박 4일을 걸어 사고 이후 처음 팽목항도 찾았다.
김 작가는 “개인적 아픔은 시간과 함께 치유되지만 사회적 참사는 사건이 해결되지 않으면 개인적 치유도 시작될 수 없다”며 “생존자들이 아픔을 이겨내고 평범한 스무살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줬으면 한다”고 바랐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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