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다이빙을 사랑한 故 새미 리 선생님 편히 잠드소서.’
8일 서울체고 다이빙장에서 지난 2일 96세로 세상을 떠난 새미 리의 추모식이 열렸다.
한국 다이빙 사상 유일한 아시안게임 금메달(1970년 방콕대회)의 주인공 송재웅 옹을 비롯해 한국 여자 수영 사상 최초 아시안게임 메달리스트(1966년 방콕대회 은메달) 김영채, 한국 다이빙 첫 아시안게임 메달리스트(1962년 자카르타 대회 동메달) 조창제 등 한국 다이빙의 ‘전설’ 30여 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모두 새미 리의 1세대 제자들이다.
키 157cm의 단신이었던 새미 리는 아시아계 미국 남자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1948년 런던대회)을 목에 건 ‘작은 거인’이었다. 인종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딛고 우뚝 선 영웅인 동시에 한국에 다이빙을 처음 보급하고 알린 선구자였다. 새미 리의 2세대 제자 격인 박유현 국민체육진흥공단 다이빙 팀 감독은 “새미 리 선생님이 곧 한국 다이빙의 뿌리였다”며 “한국 수영 역사에서 올림픽에 처음 출전한 종목이 바로 다이빙(1964년 도쿄대회)이었다. 새미 리 선생님 덕분이다”고 설명했다.
미국 남캘리포니아대(USC) 의대를 졸업한 군의관이었던 새미 리는 1950년 6ㆍ25전쟁이 발발하자 한국 근무를 자원했다. 하지만 군은 그에게 1952년 헬싱키 올림픽 출전을 권했고 남자 10m 플랫폼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런던 올림픽에 이어 다이빙 사상 최초로 2연패를 달성하는 순간이었다.
새미 리는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에서 다시 군의관으로도 활동하며 제자 육성에 힘썼다. 박 감독은 “서울운동장에 일본이 남기고 간 다이빙대가 하나 있었다. 그곳에서 철저히 기본기부터 가르쳐주셨다. 당시 다른 선수들은 공중에서 많아야 두 바퀴 반을 돌았지만 새미 리 선생님은 최초로 세 바퀴 반을 도셨다. 그런 노하우를 제자들에게 전수해주셨다”고 회고했다. 새미 리는 군 복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자비를 들여 틈틈이 한국을 방문했다. 이런 노력은 한국 다이빙이 1960~70년대 아시안게임에서 각종 메달을 따내는 결실로 이어졌다. 박 감독은 “1980년대부터 중국에게 패권을 빼앗겼지만 그 전까지는 한국이 아시아 다이빙을 선도했다”며 “제자들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였으니 하늘에 계신 선생님께서도 뿌듯해하실 것이다”고 말했다.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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