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겁다 못해 따가웠다. 그라나다의 구도심 알바이신의 좁은 골목은 11월 말인데도 내리쬐는 햇살로 명암이 또렷하다. 0~20℃를 오르내리는 기온에 누에바광장엔 털모자 달린 점퍼 차림의 관광객과 반팔 차림 젊은이들이 뒤섞여있다. 언덕을 오르는 지그재그 도로는 겨우 차 한대 지날 만큼 좁은 일방통행이고, 거기서 미로처럼 이어진 골목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 산 니콜라스 전망대에 닿는다. 설산으로 변해가는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배경으로 맞은 편 언덕 꼭대기에 알람브라 궁전이 손에 잡힐 듯하다. 해가 기울자 짙푸른 하늘을 떠도는 구름 몇 조각이 먼저 발갛게 변했다. 이어 은은한 노을이 알람브라에 스미어 회백색 성벽을 붉게 물들인다. 알람브라는 아랍어로 ‘붉다’라는 뜻이다.
▦눈물처럼 애잔하고 보석처럼 영롱한 알람브라
프란시스코 타레가를 모르는 사람도 그의 기타 연주곡 ‘알람브라의 추억’은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유리구슬이 부딪히듯 영롱하면서도, 소중한 무언가를 남겨두고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떼는 듯한 애잔함이 요동치는(트레몰로) 선율이다. 알람브라는 이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이슬람 왕국이었던 나스리드 왕조(1237~1492)의 궁전이다. 1492년 두 기독교 군주(카스티야 여왕 이사벨과 아라곤 왕 페르디난드2세)가 그라나다에 입성했을 때, 나스리드의 마지막 왕 무함마드12세(스페인 사람들은 ‘보압딜’로 부른다)는 저항이 아니라 궁궐 밖으로 나와 ‘복종의 키스’로 이들을 영접했다. 보압딜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모로코로 도망가면서 되돌아보았다는 자리는 그라나다 외곽에 ‘무어의 마지막 한숨(El último suspiro del Moro)’이라는 이름으로 남았다. 백성보다는 퇴폐적일 만큼 화려한 궁전이 눈에 밟혔을 듯하다.
기하학을 총 동원한 듯한 정교한 모자이크 문양, 그 사이로 눈부시게 부서지는 안달루시아의 태양, 자연채광으로 시시각각 변주되는 은은하고 고상한 색감. 타레가는 4분 남짓한 연주에 그라나다의 진주 알람브라의 아름다움을 축약했지만, 여유롭게 돌아보자면 3시간 이상은 잡아야 한다.
알람브라는 군사요새인 알카사바(Alcazaba), 아름다움의 결정체 나스리드(Nasrid)궁전, 현관 정원에 해당하는 파르탈(Partal), 왕족이 여가를 즐기던 헤네랄리페(Generalife) 등 4개의 구역을 나뉘어 있다. 정문 매표소에서 가장 먼 알카사바까지는 약 1km로 20분은 걸어야 하고, 헤네랄리페는 반대 방향으로 15분 정도 걸어야 한다.
알카사바는 13~14세기에 지어진 알람브라에서 가장 오래된 군사요새이다. 병영과 감옥 등은 부서져 잔해만 남았지만, 성벽 위의 아슬아슬한 난간과 일부 전망 탑은 그대로다. 원형 계단을 돌아 가장 높은 전망타워에 오르면 그라나다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왼편으로는 울창한 산림 너머로 시에라네바다의 설산 풍경이, 오른편으로는 알바이신의 정겨운 산동네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알카사바로 들어가기 바로 전에는 카를로스5세 국왕의 궁전이 자리잡고 있다. 합스부르크 군주인 그는 중남부 유럽과 사실상 남아메리카까지 지배한, 역사상 몽골제국 다음으로 넓은 영토를 다스리던 군주였다. 1526년 이곳을 방문한 후, 나스리드 궁전 일부를 허물고 알람브라의 중심부에 자신의 궁전을 세웠다. 외관은 정사각형이지만 내부는 뻥 뚫린 원형광장으로 이뤄진 특이한 구조다. 원을 중심으로 시설을 배치해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짜임새 있고 웅장하다. 전형적인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인데, 황갈색 외부 벽면은 언뜻 야자수 잎을 잘라낸 자리처럼 아랍 풍으로 보이기도 한다.
카를로스5세 궁전 바로 뒤편이 알람브라의 핵심, 나스리드 궁전이다. 알람브라에서 차지하는 면적은 넓지 않지만 기둥, 벽면, 천장, 바닥까지 하나하나가 예술이라 할 만큼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 관람에 1시간은 소요된다.
애초 6개 궁전과 2개의 타워로 이뤄진 나스리드 궁은 현재 술탄의 집무실이 있는 코마레스(Comares, 유수프1세 궁전), 그리고 왕족의 처소인 사자의 궁(무함마드5세 궁전)이 온전하게 보존돼 있다. 기독교도의 지배 이후 일부 훼손되긴 했지만, 이교도의 유물이라도 그 아우라는 함부로 없애지 못했을 듯하다. 시선을 돌릴 때마다 마주치는 조각과 문양은 현기증을 일으키고, 종유석이 쏟아져 내리는 듯한 천장을 쳐다보느라 목이 아픈 줄도 모르고 넋을 잃는다.
그라나다 관광 웹사이트는 ‘스페인과 아랍의 세련미와 섬세함이 돋보인다, 바스러질듯한 치밀함이 시각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정교한 내부장식과 견고한 외부 벽면이 조화를 이룬다, 천장 장식은 우주의 무한함과 인간의 유한함을 의미한다, 정원에서 이어지는 안뜰은 방랑자의 오아시스와 천국을 표현했다, 페르시아와 무슬림의 영혼으로 가득 채워 감각적 즐거움을 준다, 분수와 대리석을 흐르는 수정 같은 물은 술탄의 너그러움과 생명을 의미한다’ 등 건축과 미학적 의미를 한껏 부여하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감동에 견주면 쓸모 없는 수사에 불과하다. 그냥 아름답고 황홀하다. 그 이상은 없다.
이렇게 1시간여 나스리드 궁전을 헤매고 나오면, 그 축소판인 듯한 작은 궁전과 정원이 어우러진 파르탈이다. 다른 곳에 있었다면 충분히 감탄을 자아내는 건축물이지만, 천상의 아름다움을 엿보고 난 뒤라 조금은 시시하게 보인다.
술탄이 여가를 즐기던 헤네랄리페는 알람브라와 그라나다 시내 풍경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조금 높은 산자락 자리잡고 있다. 상ㆍ하부로 구분된 건물 곳곳이 수로와 분수로 장식된 정원이다. 미로처럼 꾸민 숲길까지 산책하고 나면 그제야 천상을 기웃거리던 영혼이 무사히 지상에 내려선 듯 흥분을 가라앉히고 안정감을 찾는다.
▦알람브라 관람 팁
알람브라는 하루 입장객 수를 제한하고 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3월 15일~10월 14일은 오후 8시까지) 30분 간격으로 최대 220명씩 입장시키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여행하려면 인터넷 예약이 필수다. 온라인 예약사이트(www.alhambra-tickets.es)에서 예매한 후 알람브라 매표소에서 입장권으로 교환하면 된다. 여권 또는 결재한 카드를 소지해야 한다. 성인은 15.40유로, 12세 미만은 무료다.
예약할 때 선택한 시간은 나스리드 궁전 입장시간이다. 이 시간에 맞춰 나스리드 입구에서 줄을 서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관람 동선을 짤 때 꼭 염두에 둬야 한다. 입장권에 찍힌 시간보다 최소 1시간은 일찍 알람브라 정문을 통과해야 카를로스5세 궁전과 알카사바를 둘러볼 수 있다. 헤네랄리페는 나스리드 궁전을 관람한 후 가볍게 산책하는 코스로 생각하면 된다. 알람브라 공식 홈페이지(www.alhambra-patronato.es)에서 영어와 스페인어로 기본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알람브라는 야간 관람도 할 수 있지만, 해질녘에는 알바이신 중턱의 산 니콜라스 전망대(Mirador San Nicolás)에 오르길 권한다. 저녁놀과 야간조명에 은은하게 물드는 알람브라를 감상하기에 최적의 장소이다. 발 아래 펼쳐지는 구도심 풍경도 정겹다.
식당과 상가는 알바이신의 가장 아래쪽 누에바광장 부근에 몰려 있지만, 전망대 부근에도 알람브라를 바라보며 커피나 맥주를 즐길 수 있는 카페가 더러 있다. 스페인의 전채요리인 타파스를 맛보는 것도 그라나다 여행의 즐거움이다. 한국에서 기본안주로 팝콘과 땅콩을 제공하듯 이곳에선 맥주만 시켜도 타파스 몇 조각이 무료로 나온다.
그라나다(스페인)=최흥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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