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폭력의 역사는 꽤나 유구하다. 문헌을 보면, 춘추시대 초기에 이미 ‘조직’을 갖춘 폭력단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공자 때 ‘전국구급’으로 활약한 도척 얘기다.
당시 역사를 전하는 ‘사기’에 따르면, 그는 수천의 졸개를 끌고 다니며 온갖 악행을 일삼았다고 한다. 그것도 모자라 허구한 날 무고한 이의 생간을 꺼내 회 쳐 먹었다고 하니, 그 악랄한 이름을 역사에 새겨 길이 경계로 삼기에 모자람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도척이 언급된 대목을 찬찬히 짚어보면, 그를 기술한 의도가 다른 데 있음을 알게 된다. ‘사기’의 서술이 도척을 역사에 희대의 악한으로 고발하는 것 자체보다는, 그럼에도 그가 살아서 처벌받기는커녕 갖은 일락을 누리다 천수를 다하고 죽었다는 사실을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하늘은 참되며 항상 옳은 자를 돕는다던데 정녕 그러한지를 되묻기 위해서였다. ‘사기’를 완성한 사마천이 보기에, 공자나 수제자 안회 같이 올곧게 살고자 한 이들은 대부분 궁핍했다. 게다가 요절하기 일쑤였다. 반면에 도척 같이 천도를 대놓고 조롱한 이들은 복락에 겨워했다. 타고난 천수를 누렸고 부귀를 세습하며 대대손손 잘살곤 했다. 한마디로 선인은 주로 힘들었고, 악인은 대체로 잘 나간다는 것이었다. 한 세대가 그렇게 되면 자손 대에도 줄곧 그러더라는 얘기였다. 멀리 갈 것 없이, 독립운동가 후손과 친일파 후손들의 삶만 비교해 봐도 사마천의 통찰이 쉬이 수긍된다. 가능한 악인으로, 적어도 선인은 아닌 삶을 사는 게 나아 보이는 대목이다.
하여 모두가 그렇게 살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인류의 역사는 비교적 짧게 마감됐을 것이다. 만민이 모두 악인이 되고, 악인의 악인에 대한 투쟁이 일상화되어 문명이 멸절될 수밖에 없음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마천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고약하기 그지없는 역설이지만, 악인은 선인이 있기에 그렇게 행세할 수 있었다. 악인의 영혼엔 들어 있지 않지만 선인의 영혼에는 인간다움, 곧 인문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문명의 유지와 진전을 위해 기꺼이 자기를 희생하기도 한다. 악인의 갖은 분탕질에도 문명이 보존되고 진보하는 연유다.
이 덕분에 악인은 잇속을 깨알같이 챙기며 계속 기생하며 행세하게 된다. 사마천이 도척을 언급한 의도가 여기서 비롯된다. 다름 아닌, 이 같은 지독한 부조리를 끊어내기 위함이었다. 역사가 악인에겐 미래의 밥줄을 말려버릴 수 있는 좋은 병기가 되는 까닭이다. 왜 악인이 역사를 그리 구박하는지, 악인일수록 왜 역사에 집요하게 집착하며 기필코 장악하려 하는지, 그 연유를 익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역사는 과거를 수동적으로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를 능동적으로 짓기 위해 고안됐다. 미래를 선하게 지을 수 있기에 역사라는 뜻이다. 우리는 그런 역사를 생활에 품으로써 미래의 역사가 된다. 사마천은 이러한 ‘역사 되기’를 “공분을 드러내고자 글을 쓰다” 곧 ‘발분저서’(發憤著書)라는 명제로 개괄하였다.
그는 군주에게 직언했다가 고환이 제거되는 궁형을 겪었다. 이는 지식인에겐 크나큰 치욕이었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외양만 남성으로 사는 것은 죽음만 못했기에 그렇다. 그러나 그는 이를 감내하며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사기’를 완성했다. 그러곤 서문 격인 ‘태사공자서’란 글을 써서 자신이 ‘사기’란 역사를 저술한 의의를 천명했다.
그가 보기에, 자기 가슴에 가득한 분노는 결코 사적 원한이 아니었다. 자신은 진리대로의 삶을 따랐는데 하필 나라에 도가 무너졌던 탓에 야기된 ‘공적 분노’였다. 그것은 진리가 통용되지 않는 시대서 비롯된 원망이었고, 부도덕한 자들이 떵떵거리며 행세하는 시절에 대한 공분이었다. 쉬이 삭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시대 탓이나 하며 하늘이 준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하늘이 자기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목적을 어떻게 해서든 실현하는 것이 스스로 부여한 존재 이유였기 때문이다.
이에 공자는 ‘춘추’라는 역사서를 편찬했고 ‘시경’ 등의 경전을 정리했다. 500여 년 전 주나라 문왕이 무고하게 유폐됐을 때 ‘역경’ 해설서를 저술하며 훗날을 기약했듯이, 공자도 글로써 부조리한 현실을 가로지르며 미래를 능동적으로 준비했다. 그랬듯이 사마천도 ‘사기’를 저술하여 공적 분노로 미래를 기획했다. 그리고 2016년 겨울, 우리는 강토 곳곳에서 촛불을 밝힘으로써 미래를 지어가고 있다. 밀실서 제조된 국정 역사교과서가 음지서 피어난 독버섯마냥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양식 있는 시민들은 광장과 거리에서 또 삶터에서 공분을 드러냄으로써 스스로가 역사가 되고 있다.
역사는 결코 사원(私怨)의 한풀이가 될 수 없다. 사적 욕망이 가득한 글은 과거를 비틂으로써 미래를 공멸로 이끌 따름이다. 반면에 삶터에서 굴하지 않고 밝히는 촛불은 역사가 된다. 다른 누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이 선에 기생하는 악을 태우는 촛불이 되기에 그렇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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