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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광장의 촛불이 신뢰의 횃불이 될까

입력
2016.12.0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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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토요일에도 광화문 광장에 나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집회는 짜임새가 있어지고, 시민들의 얼굴에서는 자신감이 느껴진다. 100만명이 넘는 인파가 빼곡히 들어찬 광장이지만, 유모차와 엄마 손을 꼭 잡은 어린아이들이 손쉽게 이동할 수 있을 만큼 평온한 질서가 충만하다. 유소년 시절부터 한국과 외국을 오가며 살면서, 한국의 평균적인 시민성(civility)이 낮았던 시절부터 영미권 사회보다 일견 나아진 면모를 보이는 오늘날까지 진화과정을 지켜봐 온 입장에서 만감이 교차한다.

광장의 모습을 보니, 문득 2002년 한일 월드컵 때의 광경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월드컵 유치전에서 일본을 꺾고야 말겠다고 의지를 불태우며 서명지를 내밀던 초등학생들, “역시 우리는 안돼”라는 말에 익숙해 있던 국민이 처음 폴란드를 꺾고 나서 환희와 자신감, 극적으로 이탈리아를 이긴 후 지하철 안에서 다 함께 “대한민국!”을 제창하던 그 날의 열기. 그때 나는 서명지를 내밀던 초등학생의 일본에 대한 맹목적인 라이벌 의식이 썩 유쾌하진 않았고, 스포츠를 충분히 스포츠로 즐기지 못하는 한국인들의 협소한 국가주의가 불편했고, 공동체의 환희가 겨우 “대한민국!”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언어의 빈곤이 안타깝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당시 한 좌파 학자는 “저는 세종로를 온통 벌겋게 물들인 군중들을 보며 광기, 집단적 히스테리를 느꼈습니다”라고 얘기했다. 그러나 당시 내 체험으로는 다른 점이 있었다. 비록 새롭게 획득한 감정을 표현할 언어가 부재했을지언정, 전체주의 문화가 남아있었을지언정, 광장에 있던 사람들이 느낀 것은 단지 국가주의, 민족주의적 자부심만은 아니었다. 그때 사람들은 광장에서 시민적 개인을 발견했다. 공적 주체가 될 수 있는, 희로애락을 표현할 수 있는, 그 감정을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나누고 승리할 수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깨달았다. 그로부터 십수 년이 흐른 지금에는 한 우파 문인이 촛불 든 시민들의 모습을 북한의 아리랑 축전의 집단체조에 비유해 물의를 빚고 있다. 광장의 모습이 월드컵 당시보다 한결 개인주의적이고 유연해졌는데도 말이다. 대한민국의 시민들을 굳이 북한에 비유하는, 정치적으로 오염된 발언은 퇴색된 과거의 이름과 최소한의 지성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는 치졸함의 발로이겠지만, 우려의 공통분모는 좌ㆍ우파의 문인이 시공을 초월하여 공유하는 듯하다. 나는 양쪽 모두에게 점잖게 한마디만 하고 싶다. “TV만 보시고 논평하진 마세요. 민족지(民族誌ㆍethnography)는 그렇게 연구하는 게 아닙니다.”

요즘 많은 사람이 이렇게 묻는다. 보통사람들의 문화가 한결 세련되어지고 성숙해 오는 동안, 한국의 정치권은 대체 왜 발전이 없었거나 도리어 퇴행한 걸까. 그러나 여기서 잠깐. 혹시 이 질문은 작금의 사태가 박근혜, 새누리당 등 정치 수권층에게만 잘못이 있고, 시민들은 순결한 피해자라는 믿음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을까. 나는 추후에라도 이 명제를 보다 냉정하게 검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지금 광장에는 과거 박근혜를 지지했던 사람들도 많이 나온다. 그들도 최순실의 대리 정치를, 수뢰를, 국정 농단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 중 상당수는 권위주의적 통치를, 아버지 박정희의 난폭하고 비열했던 리더십을, 공동체를 파괴해 온 적자생존의 독과점 시장논리를 신봉해 왔고, 동료 시민의 진실규명 요구와 권리 주장을 짜증스럽게 여기며 외면해 왔다. 이 모든 사고의 후진성이 국가와 사회를 침몰시켜 왔다. 때문에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광장에 함께 있는 우리는 같은 사람인가. 용인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쉽사리 용인되고 한결 더 극단적인 모습으로 치닫고 나서야 광장에 모인 촛불은, 처연하고 쓸쓸하기도 하다. 여기서 10여 년이 지나고 나면, 당신들은 또 변해 있을까, 광장의 촛불이, 우리 가슴속에서 신뢰의 횃불로 키워질 수 있을까.

김도훈 아르스프락시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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