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널리스트 ‘매도’ 보고서 쓰면
연봉 결정 성과평가에 불이익
매도 보고서 비율 공시제 무색
금감원 “평가 체제 개선” 의지 불구
“강제성 없어 한계” 목소리
지난 9월29일 한미약품이 장 마감 후 1조원 규모의 신약 수출 개발 소식을 공시하자 바로 다음 날 아침부터 증권사들은 장밋빛 보고서를 쏟아냈다. 목표주가도 앞다퉈 끌어올렸다. HMC증권은 목표주가를 전 영업일 주가(62만원)보다 2배 높은 122만원으로 제시했다. 증권사들의 장밋빛 전망은 장 시작 후 얼마 되지 않아 한미약품이 갑자기 발표한 8,500억원 규모의 기술계약 해지 공시로 깨지기 시작했다. 주가는 이날 18% 급락을 시작으로 5일 종가 기준 34만5,500원으로 반토막 났다. 하지만 이후 증권사들이 낸 투자 보고서를 보면 여전히 ‘매수’ 일색이다. 투자의견을 중립으로 낮추거나 매도 의견을 낸 보고서는 1건도 없다.
금융당국이 지난해 증권사들이 시장 상황에 관계없이 무조건 ‘매수 투자 의견서’를 남발하는 관행을 고치기 위해 매도 보고서 비율을 공시하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지만 일반 투자자들의 체감도는 사실상 ‘제로’에 가깝다. 제도 시행 1년이 지났지만 증권사의 매도 보고서는 좀체 찾아볼 수가 없다.
5일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지난달 말까지 국내 증권사들이 쏟아낸 투자 보고서는 총 2만3,180건이지만 이중 ‘주식을 팔라’는 의견을 제시한 보고서는 딱 1건에 불과했다. 비율로 따지면 0.004%다. 반면 ‘주식을 사라’는 매수 보고서는 81%(1만8,762건)에 달한다.
애널리스트들은 현실적으로 매도 보고서를 쓰는 게 어렵다고 토로한다. 주가 하락에 따른 투자자나 기업 항의는 차치하고 당장 연봉을 결정 짓는 성과평가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재 증권사들은 리서치센터장을 비롯해 영업 관련 부서 3~4곳의 개별 평가 등을 더해 개별 애널리스트의 연봉을 매긴다. 증권사들은 거래 수수료 외에도 상장 기업의 회사채 발행, 유상증자 주관 등의 기업 금융을 통해 수익을 올리는데, 애널리스트의 매도 보고서로 자칫 거래가 깨지기라도 하면 애널리스트는 이 손실에 대한 책임을 그대로 떠안아야 한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보고서 작성 수보다 영업 부서장들의 개별 평가가 더 크게 작용하기 때문에 회사 영업에 방해가 되는 매도 보고서를 쓰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은 또다시 대책 마련에 나서기로 했다. 보고서를 작성하는 애널리스트의 독립성을 높이기 위해 회사 영업실적에 따라 연봉이 결정되는 지금의 성과평가 체계를 고치겠다는 것이다. 금융감독원 고위관계자는 “전체 증권사를 대상으로 애널리스트의 성과평가 체계를 전수 조사해 성과평가 체계가 애널리스트의 독립성에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되면 증권사를 상대로 개선 권고를 내릴 것”이라고 밝혔다. 진웅섭 금감원장이 최근 “5년간 국내 증권사의 기업 보고서 중 '매도' 의견을 낸 것은 0.1%에 불과하다"고 일침을 놓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금감원은 이달 중으로 금융투자협회를 비롯해 상장회사협의회, 코스닥협회와 ‘4자간 협의체’를 열고 애널리스트의 보수산정 기준을 정해 다음 달부터 협회 규정에 반영할 계획이다.
하지만 숱한 대책에도 불구하고 제자리 걸음을 해왔다는 점에서 이번 조치 역시 큰 변화를 불러오길 기대하긴 어렵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벌써부터 나온다. 업계 한 관계자는 “협회 규정을 바꾼다고 해도 권고 차원일 뿐 강제성을 지닐 수 없다는 점이 한계”라며 “애널리스트의 독립성을 확보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동욱 기자 kdw1280@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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