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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러시

입력
2016.12.05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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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골드러시 당시를 그린 작자미상의 그림. 저들 중에 클레멘타인의 아버지가 있을지 모른다.
골드러시 당시를 그린 작자미상의 그림. 저들 중에 클레멘타인의 아버지가 있을지 모른다.

‘49ers(Forty-Niners)’는 1849년 캘리포니아로 금을 캐러 몰려든 이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노다지꾼’의 부정적인 의미보다는, 역경을 헤쳐 가는 용기의 개척자 혹은 꿈의 도전자 같은 진취적인 의미가 강한 듯하다. 샌프란시스코 미식축구팀 ‘49ers’등 여러 스포츠 팀이 저 이름을 채택했다. 특히 서부 미국인들에게 49ers는, 1850년대 캘리포니아의 성장과 도시 건설 신화, 나아가 법과 제도, 계급ㆍ계층의 위계적 질서가 정착되기 전 오직 행운에 내일을 걸던 거친 평등 시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단어일지 모른다. 그들 49ers를 낳은 캘리포니아 골드러시(Gold Rush)가 1848년 12월 5일 시작됐다.

요세미티 국립공원 북서쪽 끝 캘리포니아 콜로마의 사우스포크 아메리칸 강 인근 농지 조성 공사장 배수로에서 사금이 발견된 건 1848년 1월 24일이었다. 현장감독 제임스 마셜이란 이와 그의 고용주는 그 금빛 알갱이들이 진짜 금이란 걸 안 뒤 쉬쉬했지만, 애당초 지켜질 비밀이 아니었다.

그 시점 즉 미국-멕시코 전쟁 말기의 캘리포니아는 미국 점령지였지만 멕시코 영토였고, 종전조약으로 미합중국에 할양된 건 9일 뒤(2월 2일)였다. 의회도 경찰도 법원도 없었고, 법도 없었다. 캘리포니아가 미국 주가 된 건 50년 9월이었고, 광산법이 제정된 건 더 뒤인 1872년이었다. 교통도 통신도 불편한 시대였다. 인근에서 몰려든 48년의 금꾼들은 말 그대로 노다지를 캤다. 못해도 한 달에 평균 1년치 수입을 올리곤 했다고 한다.

그 소식을 동부 신문 ‘뉴욕 헤럴드’가 보도한 것은 48년 8월이었다. 그리고 12월 5일, 제임스 포크 대통령이 의회 연설에서 그 사실을 인정했다. 본격적인 골드러시가 그때부터 시작됐다. 사막을 건너 육로로, 배를 타고 남미 최남단을 돌아, 파나마 해협을 거쳐 대서양으로, 유럽과 남미, 아시아의 중국인들까지 그 행렬에 가세했다. 1848년 약 1,000명에 불과하던 샌프란시스코 인구는 2년 뒤 2만5,000명으로 급증했다. 샌프란시스코가 그렇게 순식간에 건설됐다.

하지만 그들 49ers에게 캘리포니아는 파장(罷場)의 잔칫상이었고, 경쟁은 훨씬 치열했다. 훗날 미국 지질조사국은 골드러시의 5년간 채취된 금이 약 370톤에 이를 것이라 추정했지만, 49ers는 이름처럼 기름진 시절을 보내지 못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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