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자 하산, 7년간 942억원 투입
로봇 PR2ㆍ운영체제 ROS 개발
연구기관에 무상대여ㆍ인턴십 채용
ROS, 전세계 로봇회사 운영체제로
직원들 8개 회사로 독립해 나와
한국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R&D) 예산 비중이 세계 1위인 나라이다. 지난해 우리 정부의 R&D 예산은 약 19조원 수준으로, 이 거액의 돈이 연구개발을 위해 학교와 기업에 투자된다. 하지만 투자 효율성이 떨어지고 R&D 프로젝트가 실제 사업으로는 잘 이어지지 않는다는 문제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과연 국가 사업으로 혁신적인 산업 생태계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최근 로봇산업에 관심을 갖고 자료를 뒤지다 ‘윌로 거라지’라는 흥미로운 회사를 접했다.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이 업체는 로봇산업 생태계를 만들어 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 정보기술(IT) 전문 매체 비즈니스 인사이더 등에 실린 내용과 경험을 토대로 이 업체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美 로봇 생태계 발전 이끈 스타트업의 힘
윌로 거라지는 2006년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스콧 하산이 설립한 신생 창업기업(스타트업)이다. 1998년 스탠퍼드대 학생이던 그는 구글의 창립자인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을 도와 초기 구글 검색의 개발에 참여했다. 이후 이메일의 주소록을 관리하는 ‘이그룹스’라는 회사를 세웠고, 야후에 4억3,200만달러(약 5,085억원)에 매각했다. 그는 그렇게 번 돈을 구글에 투자했고, 구글이 2004년 상장해 주가가 폭등하면서 엄청난 돈을 벌었다. 하산은 억만장자가 됐다.
2006년 그는 실리콘밸리의 사무실 빌딩을 샀다. 그리고 그 공간에 평소 만들고 싶었던 회사를 세웠다. 이 업체가 바로 개인용 로봇을 연구하는 윌로 거라지다. 그는 머지 않은 장래에 스스로 움직이며 인간의 심부름을 해 주는 개인용 로봇이 대중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같은 판단으로 윌로 거라지를 창립했고, 스티브 커즌스를 최고경영자(CEO)로 영입했다. 또 자신의 꿈에 공감하는 로봇 과학자들을 채용해 마음껏 연구할 수 있도록 했다. 그가 60명 정도의 직원에게 강조한 철학은 ‘일단 의미 있는 것을 만들어 내자. 돈을 버는 것은 그 다음에 생각하자’였다. 그는 매년 회사 운영에 들어가는 비용 약 2,000만달러(약 234억원)를 개인 재산으로 충당했다.
윌로 거라지는 설립 4년 뒤인 2010년 로봇용 운영체제(OS)인 ‘ROS’와 개인용 로봇 ‘PR2’를 개발해 발표했다. PR2는 작은 사람 정도의 키에 두 개의 팔이 달렸으며 스스로 이동하면서 각종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로봇이다. 이는 로봇을 이용해 각종 시도를 해 볼 수 있는 일종의 로봇 플랫폼이었다. 가격은 40만달러(약 4억7,000만원)로 책정됐지만 윌로 거라지는 이 로봇을 11곳의 연구기관에 무상으로 2년간 빌려 주고 마음껏 로봇을 연구하도록 했다.
전 세계 로봇 연구자들에게 개방한 ROS도 여러 곳에서 활용되며 인기를 끌었다. 윌로 거라지는 이 소프트웨어를 퍼뜨리고 전 세계 로봇 관련 단체와의 교류를 촉진하기 위해 인턴십 직원을 받기 시작했다. 그 뒤 130여명의 학생과 연구자가 윌로 거라지를 거쳐 갔다. 로봇연구자들은 윌로 거라지에서 인턴십을 한 것을 명예로운 경험으로 여겼고, 이곳 출신들로 구성된 ‘윌로 마피아’가 형성되기도 했다.
윌로 거라지 직원들은 냉장고를 열고 맥주를 꺼내 병뚜껑을 따도록 하는 등 단지 ‘재미’로 PR2에 다양한 일을 시켰다. PR2는 당구를 하거나 수건을 차곡차곡 접는 일도 했다. 로봇은 이처럼 사소한 일을 반복하면서 많은 발전을 이뤘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과정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직원들이 각자 독립회사를 세우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윌로 거라지에서는 3개의 재단을 포함해 총 8개의 회사가 독립해 나왔다. 그리고 그중 세 개 회사는 구글이 인수했다.
창업자인 스콧 하산도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바퀴가 달린 이동로봇에 태블릿 PC를 꽂고 이동하면서 화상회의를 하는 것에서 착안해 원격근무용 로봇을 개발하는 ‘수터블테크놀로지’라는 회사를 새로 창업한 것이다. 가정에 보급하는 개인용 로봇 개발에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판단한 그는 2013년 말 윌로 거라지의 문을 닫고 새 회사에 자신의 역량을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그때까지 약 8,000만달러(약 942억원)의 재산을 윌로 거라지의 운영에 쏟아 부은 상태였다. 비즈니스 인사이더에 따르면 하산은 윌로의 마지막을 이렇게 기억했다. “나는 직원들이 점점 불안해 한다고 느꼈다. 그래서 이제 끝을 내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이제 여러분은 자유입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러자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모두 자신의 회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던 커즌스 CEO도 호텔에서 배달 심부름을 하는 로봇을 만드는 ‘세비오크’라는 회사를 창업했다. 세비오크가 개발한 로봇 ‘릴레이’는 지금 실리콘밸리의 수많은 호텔에서 고객들에게 칫솔 등을 가져다 주는 심부름을 도맡고 있다.
민간 주도ㆍ외부 협업 있어야 생태계 혁신
윌로 거라지는 비록 문을 닫기는 했지만 어떤 국책 연구기관이나 대기업보다 전 세계 로봇산업 생태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우선 ROS는 세계 곳곳의 로봇 연구자들과 로봇 회사들이 쓰는 운영체제가 됐다. 일본 소프트뱅크의 인공지능 로봇 ‘페퍼’나 중국 무인기(드론) 업체 ‘DJI’의 드론에도 활용될 정도다. 로봇 PR2를 통해 이뤄진 다양한 시도는 새로운 로봇 회사들이 탄생하는 밑거름이 됐다. 특히 윌로 거라지의 직원들은 자신만의 아이디어로 창업에 뛰어들었다.
윌로 거라지가 로봇 생태계에 끼친 영향을 보면 혁신적인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목표, 외부와의 협력, 나눔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이 회사는 당장 돈을 벌기보다는 의미 있는 성과를 만드는 데 집중한다는 장기 비전을 갖고 이를 실천했다. 늘 재미를 추구한 것도 인상적이다. 직원들은 놀이터 같은 공간에서 로봇에게 맥주를 배달시키고, 당구를 하게 했을 뿐이지만 이를 통해 여러 가지 의미 있는 기술 개발이 이뤄졌다.
또 윌로 거라지는 로봇업계에 인재를 공급하는 사관학교 역할을 했다. 개발한 소프트웨어는 혼자 독점하지 않았다. 외부에 공개해 같이 개발하면서 혁신을 촉진시켰다. 혼자서만 독불장군처럼 일하지도 않았다. 윌로 거라지는 로봇 관련 외부 연구소, 대학 등에 PR2를 제공하고 협업했다.
순수한 민간 투자를 통해 이런 결과를 낸 것을 보며, 실리콘밸리이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반면 우리 한국의 로봇 생태계는 어떤가. 우리 정부는 2018년까지 세계 최고 수준의 로봇 기술 선도 국가가 되겠다는 목표 아래 2009년부터 연평균 약 1,000억원 이상을 투자하고 있다. 물론 어느 정도 성과는 있다. 하지만 아직 세계 시장에 내놓을 만한 대표 상품이나 기업은 나오지 않고 있다. 현장에서는 정부 과제 완수에 매달리는 데 자원을 다 빼앗겨 정작 사업이 어렵다는 불평도 들린다.
한국도 윌로 거라지처럼 신이 나서 뭔가를 만들고 공유하며 생태계를 발전시키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이런 변화를 위해서는 정부가 아닌 민간 주도의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 한국의 대기업들이 K스포츠, 미르 재단 같은 곳에 돈을 뜯기기보다 이런 미래 산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방향으로 바뀌기를 기대해 본다.
임정욱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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