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도 남는 것이 흔적입니다. 실체가 사라진 자리에서 실체가 더 드러나게 되는 이치입니다. 같은 날 역에서 헤어진 동료가 두드리는 문을 열어주지 않아도, 부모가 사준 모자를 쓰고 부모 곁을 모른 체 지나도 흔적은 남습니다. 부모가 사준 모자는 절대 잃어버릴 수 없는 모자라는 것이 흔적의 변증법입니다. 결정적 증거는 끝내 소멸하지 않습니다.
허공에 집짓기인 시도 치밀한 정치공학적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묘비를 세우지 않는 것은 흔적을 없애기 위함이 아니라, 어디에도 복종하지 않는다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인 셈이지요. 상황논리가 작동하는 것이 정치여서, 정치인들은 상황이 바뀔 때마다 말도 선택도 바꾸는 것이지요. 자기 서명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자가 되고 나서, 묘비는 세우지 않도록 조심하지만 기어이 자신의 필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 상황논리의 알리바이입니다. 그러나 고도의 좋은 공학을 가진 정치인은 상황논리의 알리바이에 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흔적을 감추어라. 거대한 죄는 이 일을 하기에 바쁘고. 흔적을 감추어라. 지금 여기가 아니라 이후의 지분을 따지는 정치인들은 촛불을 자의적인 모자로 써버리는 형국입니다. 이런 수준이라면, 브레히트의 시처럼 ‘해결방법’은 “(……)국민들이 어리석게도/정부의 신뢰를 잃어버렸으니/이것은 오직 2배의 노동을 통해서만/되찾을 수 있다고 씌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정부가 국민을 해산하여 버리고/다른 국민을 선출하는 것이/더욱 간단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전에 고려 잘하는 정치인들이 놓치는 것이 있는데, 촛불의 진심을 따라가지 않는다면 당신들은 정치인으로 불릴 수 없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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